영어로 잠꼬대를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해서 그저 즐겁게 영화 보고 재미있는 책을 듣다 보면 거짓말처럼 귀가 열린다.
아이의 귀가 열리는 징후를 엄마는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나도 딸이 귀가 열리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몰랐다. 귀가 열린다는 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어느날 밤에 일이다. 잠을 청하고 있는데 뭐라고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분명 딸이 잠꼬대를 하는 소리였다. 딸은 영어로 뭐라 뭐라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당시 엄마표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가끔 아이가 영어로 잠꼬대를 한다는 글이 올라왔는데 나는 읽고도 "에이 설마"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 들은 소리는 분명 영어였다. 뭐라고 했는지는 세월이 너무 흘러서 기억나지 않는다. 꿈에서 딸은 누구와 영어로 말하고 있었을까? 영어 잠꼬대는 그 후로도 종종 있었다. 딸이 영어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후로는 당연히 알게 됐다. 동생과 레고를 만들고 놀 때나 영화를 보며 그림을 그릴 때 딸의 입에서는 영어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토록 원했던 자연스러운 영어 스피킹이 튀어나오는 걸 들으니 놀랍고 신통했다. 하지만 곧 걱정이 됐다. 저 입을 열어줘야 할 텐데, 자연스럽고 유창한 영어 말하기를 하려면 저렇게 튀어나오는 영어를 상대해줘야 할 텐데 나는 그걸 못했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고민 고민 끝에 찾아낸 해결책은 연따, 즉 연달아 따라 말하기였다.
연달아 따라 말하기, 연따, 그 신세계
어떤 언어에 귀가 열리고 옹알이가 시작되면 그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보통은 모국어의 경우 엄마가 그것을 대신한다. 아이의 옹알이를 받아주고 되돌려주는 무수한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국어를 완성해간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에 귀가 열리고 아이가 영어를 한 두 마디씩 할 수 있게 되면 영어 네이티브를 만나는 게 최고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환경에서는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차선의 방법이 바로 연따, 연달아 따라 말하기이다. 쉐도잉이라고 하면 이해가 더 빠를 수 있다. 이 연따라는 것은 그동안 들었던 소리를 입으로 내뱉는 발화의 첫 과정이다. 방법도 간단하고 귀가 열린 아이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준비물도 간단하다. 영화를 틀어도 좋고 책을 틀어도 좋고 뭐라도 좋다. 영어 소리를 틀어놓고 아이에게 내러이터의 소리를 바로 쫓아가며 그대로 그 소리를 따라 하라고 시킨다. 1초나 2초 정도의 시간을 두고 바로 뒤쫓아 가며 원어민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내레이터가 소리치면 같이 소리치고 내레이터가 멈추면 같이 멈추고 그렇게 끝까지 쫒아서 그대로 소리를 낸다. 물론 소리만 듣고 한다. 책이나 스크립트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소리만 따라서 해야 한다. 책을 보면서 한다면 그것은 따라 읽기가 된다. 눈이 책, 즉 활자에 가있으면 그것은 읽는 것이지 듣는 것이 아니다. 귀가 열린 아이라면 처음에는 좀 서툴러도 바로 이 연따를 할 수 있다. 소리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만약에 소리를 자꾸 놓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아직 소리가 덜 채워진 경우이다. 좀 더 소리를 채워야 한다. 즉 아직 발화할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속도가 좀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의 소리를 드랍없이 90프로 정도를 잡아낼 수 있다면 그 아이의 귀는 거의 열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따를 체크하기 위한 속도로 적당한 것은 분당 135 단어의 속도로 원어민이 읽어주는 속도가 적당하다. 좀 빠르게 느껴질 수 있는데 딸아이의 경우 주니비 존스라는 챕터북 시리즈로 처음 연따를 시작했다. 왜 이정도의 소리가 적당하냐하면 느린 속도의 소리는 조금만 노력하면 소리를 잡아낼 수 있고 너무 빠른 속도의 소리는 쫓아가기가 숨차고 벅차서 연따 재료로 좋지 않기때문이다. 조금 빠르다고 느껴질 정도의 소리를 잡아내는 연따를 매일 10분에서 20분 정도 한 두 달만 해도 아이의 영어 말하기는 놀랍게 성장한다. 아이의 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연따를 하면 할수록 아이의 영어는 더 유창해지고 영어 말하기도 한결 더 자연스럽고 좋아진다. 딸이 한창 연따를 루틴으로 했을 때 툭치면 툭하고 튀어나온다고 말할 정도로 영어 스피킹이 유창했다. 매일매일 20분 정도씩 연따를 6개월 이상하고 아이에게 그날의 타픽을 주면 아이는 그것에 관해서 3분 정도 즉석에서 스피치를 하곤 했다. 연따를 하고 3분 스피치를 하면서 제일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이것이 고통 없는 말하기라는 점이다.
연따, 고통 없는 말하기
우리 세대는 영어 말하기라면 오금부터 저려온다(나만?). 상대방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재빨리 해석하고 머릿속에서 영작을 한다. 이것이 문법적으로 맞는지 아닌 지 스스로 검열을 하느라 입 밖으로 영어가 튀어나오지 않는다. 이래서 영어 말하기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점점 더 입을 다물게 되고 마침내는 말하기 울렁증까지 생긴다. 하지만 연따는 다르다. 딸의 말하기를 들으며 내가 느낀 것은 "울 딸 영어 잘하네"가 아니었다. 고통 없는 말하기 그저 들리는 말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말하는 말하기, 그것이 된다는 것에 대한 감동이었다. 딸은 머릿속에서 영작을 하지도 않았고 문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문법에 맞는지 검열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딸의 성격이 외향적이라 쫑알쫑알 말하기를 즐기는 아이도 아니다. 딸은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아이다. 그런 아이가 영어를 불편 없이 술술 말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 학습법이 정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외국 국제학교 출신인가요?
딸과 한창 집에서 영어를 하던 당시는 어떻게 보면 학원의 전성기 같은 시절이었다. 대형학원이 론칭을 하고 엄청난 규모의 설명회를 열면 엄마들이 그 학원의 강당을 꽉 채워서 설명회를 듣고는 했다. 우리 지역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학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던 시절이었고 나는 3년간의 무림의 생활의 끝무렵 쯤에 9살 딸을 데리고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라는 것을 처음 치러봤다. 두 군데에서 치렀는데 그중에 한 곳 P라는 학원에서 딸은 2시간에 걸친 시험을 보고 원어민과의 인터뷰를 하게 됐다. 딸이 원어민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통유리 부스로 된 교실안의 딸과 원어민의 모습이 훤하게 보였는데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딸아이가 원어민이랑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심장이 떨려 왔다. 원어민은 리터러시 플레이스 4.1(미국 학년 기준으로 4학년 1학기) 책의 한 부분을 펼쳐서 딸에게 읽게 하고 질문하고 아이는 대답했다. 부스를 나오는 딸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있었고 원어민은 나이스, 스마트를 외치며 딸의 영어실력을 칭찬했다. 물론 그 학원을 등록하지는 않았다. 상담하던 선생님이 아이가 어느 외국의 국제학교를 다녔냐고 물었다. 엄마표 영어학교 3학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