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전업주부의 가치" 라는 헛소리

전업주부라는 애매모호한 삶의 시기를 살고 있는 여성들

주부의 노동에 대한 월 432만 원의 가치, 그것은 속임수


 


우선 전업주부란 말을 생각해본다.

그냥 주부도 아니고 "전업"이란 업의 글자가 수식어로 앞에 붙는 이 주부란 말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업주부라는 말은 직업인지, 계급인지, 이미지인지, 그녀가 처한 상황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상징인지.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이렇게 물을 때, 엄마는 뭐하시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집에서 놀아요.

얼마 전 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는 후배랑 통화할 일이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내 말에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 퇴사했어, 요즘 백수야. 

이제 다시 물어본다. 전업주부의 개념은  무엇인가?


주부의 일은 한 가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이다.

한 가정을 먹이고 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곳, 아름다운 이곳은 모든 노동은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노동이 돈으로 환산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2008년에  전업주부의 가치를 월 432만 원(문화일보 기사 참고)의 돈으로 환산했다. 

노동이 돈인 이곳에서 주부의 노동을 가치로 환산했고 그리고 그 가치를 돈으로 계산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가치와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이 나는 이상하다. 가치가 돈이고 돈이 가치이다. 이것은 내 방식이 아니고 자본주의 방식이다. 주부의 가치는 워낙에 고결해서 돈으로 따지면 안 되지만 그래도 굳이 돈으로 그 노동의 가치를 환산해보면 432만 원이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432만 원이라는 이 돈은 돈이 아닌 가치에 방점이 찍혀있다. 가치와 돈을 분리하면서 432만 원은 돈이 아닌 가치에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주부들은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존재들임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지급받지 못하는 모든 노동에 대한 찬사는 그냥 공염불이고 속임수이다. 전업주부의 가치가 432만 원이라면 지역사회던 정부던 간에 누군가는 그 돈을 지불해야 하지 않은가?

가치라는 애매한 단어로 누구를 속이려드는가?  

가치로 말할 것 같으면 주부의 일은 그들이 말하는 가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그들이 전업주부의 가치를 돈으로 운운하며 주부의 삶을 위로하듯 추켜올려 세우지 않아도 우리 주부들은 열심히 내 몸을 갈아가며 살고 있다. 그들이 가치를 매기던 말던 말이다. 그들이 말장난을 하길래 나도 말장난 좀 해봤다.








전업주부인 당신이 우울한 진짜 이유




 세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세상의 구성원들은 모두 교육받은 존재들이다. 주부들도 교육받았다. 하지만 주부들은 주부를 목표로 교육받지 않았다. 주부들은 사회의 구성원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세상은 오픈돼 있고 문만 열고 나가면 세상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데 주부들은 집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한다. 나 역시 두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식물을 키우거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학교에서 뭔가를 배웠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그 뭔가는 전혀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아이를 낳기 전에 그 어떤 교육보다 나 자신을 알아야 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아이라는 존재를 키우기 전에 나라는 존재를 알아야 하고 나와 화해가 돼 있어야 했고 나를 핸들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학교 교육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 것은 가정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는데 그 가정의 주인인 그들의 엄마 아빠도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말이다.  학교교육이라는 것은, 평생 자신과 대면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 커리큘럼을 짰고 내용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지경에 이르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나도 그들처럼 나를 대면하지 않은 채 까닭 모를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내 앞에 떨어진 자식이라는 존재를 키우며 나와 대면해야 했고 나를 알아야 했으며 나와 화해했다. 그래, 결과적으로는 감사하다. 나를 알게 해 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까지 10년 이상의 절망감과 우울감 그리고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여자들 중 대다수가 나중에 주부가 될 것이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면  왜 여자들은 그것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가?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모든 일을 왜 모성애에 의존하고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한 채 팽개쳐두는가? 반대로 생각해보면, 여자들도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로 남녀가 다를 바 없는 교육을 받아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그 받은 교육을 실현하는 합당한 장소에 있지 않은가? 교육받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곳에 있으면서 정작 교육받은 내용을 실현하는 곳엔 또 있지 않다. 현상을 그대로 말하자니 내가 하는 말에 도대체 논리를 세울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고 뒤죽박죽이냔 말인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자유롭고 개인적인 영역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으로 저출산이 문제가 되고 있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하면서 여전히 육아에 대한 영역을 개인의 영역으로 넘기고 있다. 인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결혼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2세를 낳아 역사를 이어가는 시간에 쓰고 있는데 여전히 이에 대한 교육은 전무하다. 오로지 산업체의 일부를 이루는 기술에 대한 교육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교육자체가 틀려먹었다. 모든 교육이 대학입시라는 목표에 맞춰져 있고 학생들의 대다수가 대학을 간다. 우리는 거의 27년 정도를 교육을 받고 있고 그 교육의 목표는 오직 대학입시인데 그 대학을 졸업해서는 가는 곳은 또 다른 현장이다. 주부들은 이 현장이 낯설다. 위대한 가치가 있다는 이 역할이 너무 낯설다. 하지만 유능하게 해 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왜냐면 나는 전업주부니까. 나는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니까 집과 아이들에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 학교에서 대체 배운 적도 없는 이일을 다시 0 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 결과는 전적으로 내게 있다. 그래 살림은 뭐 어떻게 해보겠다. 하지만 아이는 어떻게 하는가? 살아 움직이고 자아를 갖고 있는 저 생명체 말이다. 나도 아직 모르는 나의 자아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것인가 말이다. 저 생명체의 육체와 정신까지 모두 나의 육아의 영향을 받는다니, 망연자실, 세상에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나 자신도 아직 모르겠고 나도 엉망인데 저 어린 생명체를 어찌해야 하는지 아무도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네게는 모성애가 있지 않은가? 그 모성애를 잘 이용해봐 이렇게 암묵적으로 말하고 강요할  뿐, 아이 키우는 것이 힘들고 버겁다고 말하면 당장에 모성애를 의심받고 임무를 방기한 전업인이 됐다. 나는 힘들지 않아야 하고 우울하지 말아야 했지만, 정작은 너무 힘들고 너무 우울했다. 모성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 아등바등 발악을 했다. 전업주부, 엄마의 삶을 살 때 이 사회에 기대할 것이 없었고 자본주의와 위배되는 희생이라는 것을 깔아야 가능했다. 자본주의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을 찾으면 안된다. 너무나 자본주의 답지 않다. 자본주의와 위배되는 삶이 전업주부, 엄마의 삶이다. 그런데 우울하지 않을 재간이 있는가?









이전 05화 자기만의 방과 2200만 원의 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