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9시 뉴스에는 안 나갔지만 연합뉴스 외신에 짧게 보도되었다. 재 파키스탄 한국 대사관에서도 실시간으로 한국인 피해자가 있는지 파악하는 전화가 오갔다.
아니, 내가 이렇게 세계적인 인물이었었나........가 아니고......... 마침 내가 사는 곳이 이 나라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유명한 커다란 건물이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이 건물에는 한국인 파견자가 많이 산다. 대형 주상복합 건물이다 보니 건물 입구부터 24시간 무장한 보안요원이 상주하므로 상대적으로 도둑 강도 및 테러로부터 안전하며, 이슬라마바드 최대 쇼핑몰과 한 건물이다 보니 생필품 마트를 포함한 쇼핑이 매우 편리하므로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아파트이다.
불난 소식은 한국인 단톡방을 통해 처음 알았다. 우리 팀장님 한 분이 식당에서 불났다며 대피 중이라고 했을 때만 해도 상황을 잘 몰랐는데, 파키스탄 파견자 총괄 조직장께서 대피자 점검을 하기 시작하면서 아,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번 주말도 대외 기고문 집필활동으로 바빴던지라 주말 도심지 출타를 포기하고 지사 내 사택에 콕 박혀있어서 상황에 대한 감이 느렸다.
불은 2022년 10월 9일, 오후 4시경(한국시간 오후 8시경) 처음 발화되어 번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쇼핑몰 4층은 식당가로 이곳 어느 곳에서 발화가 되었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아직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다.
우리 팀장님들은 모두 제 때 비상전화를 잘 받고 걸어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 비상 안내방송은 없었다고. 팀장님 중 한 분은 신발 갈아 신을 정신도 없었을 정도로 욕실화만 신고 바람같이 나왔다고. 아주 칭찬할 일이다. 대피시에는 1초가 다급하다. 귀중품 챙기려다 목숨 버린다. 비상탈출 시 이미 모든 엘리베이터는 정지되어 있었으며, 복도까지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집도 고층이었던 까닭에, 단 한 번도 계단을 이용해서 내려와 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이용하여 탈출을 시도할 때 로비에 연결된 통로가 막혀있었더란다. 그래서 반대편 통로에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잠긴 문을 강제로 파손하고 탈출했다고. 아~ 이거, 불이 내부로 번졌거나, 대피가 조금 더 늦었더라면 대피인원 전체가 가스 처형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 그려진다. 화재 인명피해의 대부분은 불에 타 죽는 게 아니라 호흡곤란 질식사 아니었던가...
어쨌든, 우리 팀장님들을 포함해서 센타우러스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휴우....... 인샬라....... 고맙습니다.
대피한 한국인들은 이슬라마바드에 위치한 관계회사 사무실에 집결해서 본사에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의논한 후 헤어졌다. 일단 당장 잘 곳이 없으니, 단신 부임자들은 한국 비즈텔에서 임시 기거하고, 가족부임자는 인근 호텔을 임시 이용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불이 난 A 타워는 구조안전진단을 마칠 때까지 출입통제가 이루어진다고 보도되었다. 사진과 동영상만 보고 판단하기엔 시내 쪽 외벽이 홀라당 꼭대기층까지 탔고 연기가 엄청 피어올랐지만, 다행히도 내부 화재까지 번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긴 한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 하지만 살던 집엔 냉장고, TV, 가구류 등 집에 딸린 편의용품 외에도 양복이며 구두며 겨울 옷가지며 내 개인 짐도 많은데, 저 많은 연기를 뒤집어쓰고 괜찮으려나 걱정이 된다.(사람 참 간사하다. 금방까지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는데.)
구글링, 인스타를 싹싹 긁어서 정황 정보를 확인해보니 불은 두어 시간 만에 잡혔고 점검팀이 세부 점검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내가 사는 집은 무사하겠구나 안도감이 살짝 들지만, 언제 들어갈 수 있을는지 기약은 없다. 어... 그럼 우리 팀장님들 다음 주 출근은 어떻게 하고? 아흑. 머리가 살살 아파온다.
운이 좋았다. 어느 누가 잘해서 그렇다기 보단, 그저 운이 좋았다. 아무도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방화시설이 잘 되어있어서, 초동진화를 잘 해서라기보단 그저 운이 좋아서 다들 살아남았다. 호텔 보안의 이유에선지 대피로는 잠겨있었고 비상탈출 방송 같은 건 없었다. 훤한 대낮에 일어난 불이라 다들 자력으로 알아서 대피했고, 소방서에서 애쓴 덕분에 더 큰 불로 번지기 전에 불길이 잡혔다. 그런데, 불이 만약 한밤중에 났다면? 마침 강풍에 실내까지 거센 불길이 번졌다면? 누군가 전화를 못 받고 연기에 갇혔다면? 그리고 그게 나였다면?
한국에선 죽는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 없었는데 왜 이 나라에선 삶과 죽음이 이다지도 가깝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해외위험국가 1급지 수당을 몇 푼 더 주긴 하는데, 그게 그냥 주는 게 아니구나 느껴지기도 하다. 아휴, 모두 안전하게 살아남아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거기에, 집에 놓고 온 내 양복은 탄내가 배지 않았을까 걱정이 더 되는 걸 보면 나란 존재는 너무나 가볍고 간사하다... 모두 죽다 살아난 거 아는데, 그건 그거고 양복 냄새 배는 걱정이라니.
이웃 작가님이 며칠 전에 유언장 이야길 하셔서 무척 공감이 되던데, 나도 유언장을 미리 써둬야겠다는 생각이 든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