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쯤 시작된 산불은 점점 도로변으로 내려온다. 소방서, 산림청, 시청 등 주요 정부기관에 모두 연락을 취했지만, 순찰차량이 상황을 한번 쓱 보고 가버린다. 다른 쪽이 더 급하단다.
나무가 그렇게 빽빽하진 않은 산이라 오른쪽 능선은 두어 시간 있다 자연진화가 되었다. 그런데 지사의 정문 쪽은 자꾸 산불이 기어 내려온다. 그냥 두면 이제 전신주까지 태워먹을 기세.
이쯤이면 지자체 수준에서 광역 위기대응체계가 가동될 법도 한데, 여긴 그런 거 없나 보다. 도로를 저만치 가로질러 난 산불이니, 지사가 위치한 곳까지 번질 확률은 낮아 보이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여차해서 불씨가 바람 타고 오면 지사까지 불이 번질 수 있다. 그리고 전신주 태워먹으면 지사도 수전을 못 하니, 우리가 불편해진다. 아니 누가 첩첩산중 한밤에 헬리콥터 동원해서 불 꺼 달랬나. 소방차 한 번 와서 물대포만 쏴 주면 도로 주변 불은 금방 꺼질 것 같은데. 분명 알고 있으면서 아무런 조치가 없다.
왓츠앱의 온라인 매니저 소통방에서는 실시간으로 보고가 올라온다. 지자체 소방서는 이곳까지 지원할 생각도 여력도 없어 보이니 지사 주변만이라도 알아서 보호해야 할 시점이다. 마음 같아서는 전 직원 동원령을 내려서 양동이라도 이고 지고 저 불을 끄러 가고 싶지만, 지자체와 지역 주민도 움직이지 않는데다 내 책임구역 밖에서 벌어진 일에 함부로 직원을 동원하는 것도 내 권한을 훌쩍 넘어선다. 공식 채널로 직원을 동원했다가 출근수당, 시간외수당을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현실적인 걱정도 앞선다. 모두가 다 내 맘 같을 수는 없지 않나. 간부급 현지인 매니저들과 상의하니 외부 광역 진화 지원까지는 무리고, 인근 구역 자체 방화벽만 구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인다.
우선되는 방화구역은 전신주 인근까지 번지는 불을 차단하는 것, 그리고 도로 근처까지 접근하는 불길을 잡는 것. 외곽경호 직원 및 일부 비상대기 직원으로 소규모로 팀을 꾸려 불을 끈다. 특별한 진화장비를 갖추고 있을 리가 없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두드려가며 불꽃을 순간 덮고 날려서 끄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도 불길 자체가 드세지 않아 두드려 잡으니 기세가 잡혀간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현장을 통제하다 어느 정도 안전한 범위라는 생각이 들자 경비책임관에게 현장 통제를 넘기고 숙소로 복귀했다. "밤 새 상황이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 실시간으로 전화를 주세요."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자는 둥 마는 둥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에 눈을 떠보니, 불길 대부분이 잡혔다는 안도 섞인 보고가 들어와 있다. 밖을 나가보니 저 멀리 불이 났던 산에서 아직도 숯덩이가 내뿜는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월요일 출근 후 매니저 미팅 때 전날 산불 얘기를 꺼냈다.
"아니 왜 이렇게 산불이 잦나요? 이번에는 화재 원인이 뭐래요?"
자리에 있던 모 매니저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어제 화재사건은 제대로 조사된 바가 없고 공식 화재원인이 밝혀진 바도 없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인이라는 것이 한국인인 내 기준으론 황당할 지경이다.
1. 산림청의 고의적 화재 조장
- 응?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두 번 물어봤다. 산림청이 불법적으로 제3자에게 정부의 승인 없이 나무를 판매하며 판매한 나무의 부족을 덮기 위해 고의 산불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2. 주민들의 고의 화재
- 주민들은 멀쩡한 나무를 함부로 벌목할 수 없다. 다만, 화재로 손상된 나무는 벌목이 가능하므로 일부러 화재를 낸 다음 나무를 벌목해서 연료로 쓰기도 하며(이건 이미 한 번 언급한 얘기다.),
- 산불은 나무뿐만 아니라 산에 소복이 쌓인 낙엽도 태우는데, 이걸 싹 태우고 나면 그 자리에 풀이 잘 자란다고 한다. 풀이 잘 자라면 가축들 사료로 유용하게 쓰기 위한 목적이 있대나......
- 꿩 퇴치용으로 이 시기에 불을 낸다고 한다. 늦봄 초여름은 꿩의 번식 시기로 둥지와 알 또는 아직 날지 못하는 새끼들이 이 시기에 많은데 불을 내어 씨를 말려버린다고. 꿩은 잡식성이라 농민들에게 미움을 받나 보다.
산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이렇다 보니, 산림보호의식이 투철한 한국인들 눈에는 이들이 산불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매 해 반복되는 산불이다 보니 산에 나무가 별로 없으며, 있더라도 듬성듬성한데, 그게 또 자랄만하면 이렇게 고의 산불을 내어 버리니 어떻게 산이 푸르겠나...
아... 이제 좀 정 붙이고 살려는데 부쩍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던 어젯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