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딱히 무슨 계절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이런 질문에 항상 멈칫한다. 봄과 가을은 꽃가루 앨러지 때문에 고생하고, 여름은 끈적하고 텁텁 막히는 느낌 자체가 싫고, 신체가 늘 피골이 상접한 탓에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를 못 견디는 편이다. 그나마 성향상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며 집콕하고 있으면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겨울이 나은 편이긴 한데, 청구되는 난방비에 또 가슴이 시려와서 그건 그거대로 싫다. 돼지풀 꽃가루 앨러지만 아니라면 가을이 좋은데, 앨러지로 고생하는 기억이 훨씬 커서 좋아하는 계절로 꼽기는 망설여진다. 그래도 최근 한 2년간 부지런히 마스크를 쓰고 다닌 덕분에 확실히 앨러지로 인한 고생은 요즘엔 조금은 덜 했던 것 같다.
뭐 암튼, 4계절 중 어떤 계절이 그나마 견디기 나으세요?라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겨울. 난방비 걱정만 아니라면 집돌이 성향자에게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런 내가, 사상 최고의 더위로 해외토픽에 보도되는 파키스탄에 와 버렸다. ㅠㅠ 덥다. 진짜 덥다.
이 나라 더위가 어떤 느낌이냐면, 냉방이 되는 건물이나 차에서 밖으로 나가면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는 느낌을 확 받는다. 모든 피부와 호흡기가 헉 더워 하고 느끼는 그런 느낌. 이게 그냥 한국 한여름 무더위 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다. 기온은 한국보다 10여도 더 높은데, 신기하게 습도가 확연히 낮다. 여름 습도가 오늘 기준해서 17% 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엄청나게 더운데, 땀이 잘 안 난다. 정확히 말하면 땀이 나자마자 다 증발해버리고 피부에 잘 안 남아있게 된다. 덥긴 더운데, 끈적함은 확실히 덜 하다.
일전에 한 번 말했지만, 이곳 파키스탄은 골프장 그린피가 무척 싼 나라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린피가 1천 루피(7천 원)밖에 안 했다던데, 경제가 폭망하고 환율이 엉망이 되자 대부분의 골프장이 그린피를 두배 세배 올려버렸다. 평지에 위치하고 외교단지와 가까운 이슬라마바드 골프클럽은 3천5백 루피(2만 5천 원), 산기슭에 위치한 마갈라 그린스 골프클럽은 2천5백 루피(1만 8천 원)로 가격이 올랐다. 골프 치는 사람은 어차피 이 나라 상류층 아니면 외국인밖에 없어서 세 배 아니라 열 배가 올라도 장사가 될 것 같기는 한데, 왜 하필 내가 파견 나가는 시점에 올리냐고.
한국 골프장 그린피가 요즘 최소 20 ~ 최대 40만 원 정도 한다고 하니, 어쨌든 여전히 한국 대비 골프 가격이 무척이나 싸다. 골프를 좋아하는 한국 지인 한 분은 "여기 있는 동안 무조건 골프를 많이 치고 가야 남는 거예요. 한 번 칠 때마다 30만 원씩 번다고 생각하세요."라며 늘 파키스탄 골프 예찬론을 설파하신다. 주말에 노니 뭐하나. 오늘도 어김없이 골프 회동 제안이 들어왔고, "30만 원 벌러 가자"는 생각으로 약속을 잡았다.
자, 문제는 요즘 날씨. 한 낮 기온이 40도가 훌쩍 넘는다. 한낮에 밖에 나가보면, 어디가 남쪽인지 분간하기 무척 어려운데, 햇살이 머리 바로 위에서 내려쬐서 그림자를 찾기 힘들다. 그러니까 이렇게 덥지. 이런 기온과 햇살 아래서 한낮에 골프를 친다는 건 고문에 가깝다. 그래서, 주말 골프는 무조건 새벽 티업을 해야 한다. 새벽에 치러 간다고 시원한 것도 아니다. 조금 덜 덥고, 햇살이 강하지 않은 것뿐이다. 고위도에 위치한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현지인보다 피부가 투명하고 얇아 자외선에 매우 취약하다. 더워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똘똘 싸매고, 팔토시 하고, 자외선 차단 마스크 쓰고, 촘촘히 선크림 바른 후에 나가야 한다. 그런 연유로 다들 똘똘 싸매고 눈만 내놓고 다녀서 골프장에서 누굴 만나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파이잘 모스크 위로 해 뜨는 광경은 나름 웅장하다.
저 멀리 파이잘 모스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느끼면서 티업 하면 조금 웅장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경관은 참 좋구나. 전반 9홀을 다 도니까 대충 두 시간이 흐른다. 7시 반. 해가 완전히 다 떴고 햇살을 맞고 있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후반 6홀쯤 도는 시간이 9시. 아. 이제부터는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골프 우산을 쓰고 햇살을 막으며 이동해야 그나마 견딜만하다. 후반전은 오로지 빨리 치고 들어온다는 일념으로 바람같이 끝내고 집으로 이동. 샤워하고 에어컨 트니까 살 것 같다. 역시 첨단기술과 돈이 좋구나.
아직 9시도 안 되었다. 헉헉헉헉헉... 태양을 피하고 싶다.
열역학 공부한 공돌이들은 알겠지만, 에어컨디셔너 같은 열펌프 열교환기의 외기 대기온도가 올라가면 효율이 급격히 안 좋아진다. 즉, 같은 기온 유지하려면 전기를 무지막지 써야 한다는 뜻. 아, 모르겠고, 일단 살고 보자. 지난달까지만 해도 목에 물수건 둘러가며 에어컨 안 켜려고 갖은 수를 쓰고 살았는데, 이번 달부터는 그냥 방법이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 덜 벌고 편하게 살련다.
참고로, 요즘 파키스탄 경제가 엉망이라, 전기 공급이 잘 안 된다. 전국을 대상으로 제한송전 중이며, 하루 절반도 전기가 공급 안 되는 지역이 많다. 전기공급도 지역차별이 있어서 부자동네는 거의 단전 없이 공급되며, 가난한 동네일수록 단전이 잦다고 한다. 대신, 부자동네는 전기요금도 차별해서 더 낸다고. 제한송전의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무더워서 전력 수요는 많은데 가동할 발전기가 없는 탓이며, 이 마저도 멀쩡한 발전기를 돌릴 석탄 등의 연료를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수입하지 못해서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이유로 석탄 가격이 저가 대비 4배 이상 올라서 우리나라 역시 수입 연료비 급등으로 고생 중이다.
내가 사는 센터로스 아파트는 자가발전기를 운영하는 큰 빌딩이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단전되지 않고 전기 공급은 잘 된다. 정확히 말하면, 단전시마다 대형 자가발전기가 가동된다. 대신, 디젤발전기를 가동하는 까닭에 그 연료비마저 요금에 전가되어 전기요금은 매우 비싼 편이다. 대충 계산하면 한국 가정용 1단계 요금 대비 3배 정도 비싸다. 가계수입 등 평균 경제력을 고려한다면 거의 30배 비싼 거라고 봐야 한다. 정말 끔찍하게 비싸다.
현지 지인에게 아니 하루에 전기가 몇 시간밖에 안 들어오면 냉장고는 어떻게 가동하냐 음식은 안 상하냐 물어보니까, 단전되는 시간에는 냉장고 문을 아예 열지 않고 냉기를 보존하며 가동하면 그럭저럭 쓸 수 있단다. 단전이 매우 잦으니 상류층 저택에는 대부분 가정용 비상발전기가 따로 있으며, 비상용 배터리를 갖춘 집도 꽤 된다고. 우리나라는 30분만 단전되어도 산업부 장관이 옷 벗고 나갈 만큼 난리가 날 텐데 이 나라 사람들은 언제 봐도 참 이해심이 깊고 정부에 인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