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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y 22. 2022

뒤늦게 밝혀진 맥주 밀수입 사건

이게 웬 횡재냐

 파키스탄에 파견 온 덕분에 인생 계획에 0.001도 없이 갑자기 시작된 나의 골프 라이프.


 치안도 불안하며 테러 위험국가라 외부 활동은 평상시에도 통제를 받는 편이며, 튀는 외모의 외국인 신분으로 딱히 어디 갈 수도, 갈 곳도 없는 한국인들이 주말마다 모이는 곳이 있다. 바로 골프장. 골프 필드 입장료는 골프장에 따라 1,500~3,500루피(1만 원~2만 3천 원) 정도밖에 안 하니, 한국의 1/10도 채 되지 않는 놀라운 가격을 자랑한다.(내국인은 저기서 또 50%...)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와 대비해도 월등히 저렴하며, 많은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시설로 무장 경호인력들이 출입구를 철통경호해주기 때문에 안전이 보장된 곳이다. 너무 무더운 나라라 잔디의 질이 살콤 거칠기는 한데, 그렇다고 관리되지 않는 수준 정도는 아니고 페어웨이와 그린의 잔디는 항상 잘 깎여있다.


이런 뷰 보는 맛에 필드를 나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이곳에선 시간만 되면 골프를 치는 것이 나중에 돈 버는 거라고들 비교하는데, 짠돌이 중에서도 왕 짠돌이인 나로서는 그 돈도 아까워서 아주 가끔만 골프장을 찾는 편이다. 골프장에 가야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한다고 매주 모이지만, 나는 성향상 100% 집돌이 내향인이며, 취미 활동은 시원한 집에서 브런치로 글 쓰고 글 읽고 하는 걸로 충분하다. 취미는 모름지기 돈이 들면 안 되는 거다. 그래야 즐기면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버뜨. 나도 회사원 아닌가. 그것도 조직을 이끄는 조직장 신분. 사교모임의 중심이 골프장이 되는 만큼, 골프를 아예 안 칠 수는 없다. 때때로 단체 골프대회를 열기도 하며 송년회 신년회를 골프모임으로 대체하기도 하는 이 나라 내의 한인사회에서 골프를 치지 않는다는 건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사교적 모임에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기본은 해야 한다. 당구도 100점 수준이면 게임에 낄 수 있고, 볼링도 100점만 넘기면 게임에 방해는 안 되듯, 골프도 백돌이 정도는 해야 민폐 수준이 안 된다. 백돌이가 안 되면 게임 진행이 현저히 느려지며(남들 한 홀에 4~5타 치고 끝낼 때 혼자 7~8타 친다고 생각해봐라.) 항상 뒤쳐저 따라가기 바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쉽게 지친다.


 아니 또 서문이 너무 길었네.



 암튼, 싫으나 좋으나 찾게 되는 골프연습장. 요즘엔 한낮이 너무너무 더워서 아주 이른 시간에 후딱 치고 와야 한다. 오늘도 연습구를 100개쯤 날리고 준비한 생수통이 어딨나 골프백을 뒤적뒤적 하다가, 주머니 저 아래쪽에서 묵직한 것을 찾았다.



 으응? 이거 뭐임???????


 외모도 찬란한 한국산 Cass 맥주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https://www.youtube.com/watch?v=Y3s_GYdceVg

한 곡 듣고 갑시다. 영탁 -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가만 생각해본다. 음. 이게 중고 골프백이고, 골프채랑 몽땅 꺼내보지도 않고 들고 왔었지. 골프백 인수했을 때 주머니에 뭐가 들었나 확인해보지도 않았구나. 전 골프백 주인장이 먹으려고 넣어 둔 맥주캔이 산건너 물건너 바다건너 여기까지 따라온 거다.


※ 이전 스토리를 모르는 분들 위해서. 아래 글이 그 문제의 당근마켓 골프백 시작 스토리.

https://brunch.co.kr/@ragony/2


 이 나라는 맥주 한 캔도 통관이 안 되는 금주 국가다. 왜 세관에 안 걸렸나 곱씹어보니, 모든 수하물을 X-레이 전수검사를 했는데 골프가방은 너무 커서 검사기에 안 넣었다!


 그러니까, 나도 몰랐고 세관원도 몰랐고 내 운전기사도 모른 채로 이 맥주캔을 가방에 넣은 채로 진주에서 인천공항까지, 인천공항에서 도하공항까지, 도하공항에서 이슬라마바드 공항까지, 센터로스 숙소에서 다수의 골프장까지 수십 번을 무겁게 왔다 갔다 한 거다. 던지고 깔리고 카트에 실려 덜컹대기를 부지기수로 해 댔는데 안 터지고 남아있는 게 용타.


 마침 목도 마르고, 한잔 캬~ 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땡볕 더운 날씨에 데워진 맥주가 맛있을 리 만무하고, 무슬림들이 지켜보는 야외에서 음주행위 역시 용인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도로 가방에 넣었다.


 의도치 않게 맥주를 밀수입해버렸네. 맥주라 다행이지 전 골프백 판매자가 여기에 마약이라도 몰래 감춰놨더라면 자칫 재수 없었으면 영원히 이번 생에 게임 종료될 뻔한 일이었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맥주니까, 최대한 아껴두었다가 소중한 날에 꺼내먹어야겠다. 더 중요한 스토리를 담뿍 태워서. 어쨌든 횡재했다. 이게 웬 귀하디 귀한 한국 맥주냐, 캬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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