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추천 메뉴요? ‘님 마음대로’ 요.

by 김연경

카페에서 일할 때 듣는 질문 중 난감한 질문을 뽑으라면 이거다.

“뭐가 제일 맛있어요? 추천 좀 해주세요.”


일단 이 질문을 들으면 나는 프롬프트가 입력된 챗지피티마냥 두뇌풀가동을 한다. 그동안 내가 먹어본 음료들의 맛과, 일하면서 쌓인 손님들의 주문 분석과, 30년 넘게 쌓아 온 나의 인류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고 또 뒤져서 이 손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최적의 메뉴를 찾아낸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메뉴 추천이 간단한 손님들이 있다. 바로 50대 이상의 남성 손님들이다. 왠지 국밥집에서 소주를 기울이실 것만 같은 분들이지만 생각보다 정말 카페에 많이 오시고, 대개 맛있는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하시는 것도 이 분들이다. 특히 ‘달달한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많이 하시는데,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보통 카라멜마끼아또 많이 드세요.”


커피 추천해 달라고 했던 50대 이상 남성분들이 카라멜마끼아또를 싫어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쌍따봉을 날리고 가시거나, 다음에 오실 때마다 능숙하게 카라멜마끼아또를 주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카라멜마끼아또’라는 왠지 쪼꼬맣고 달콤한 발음과 이미지가 대비되어서 그런가? 추천해 드린 걸 맛있게 드시니 뿌듯하기도 하다.


한편 드시고 싶은 것이 확고하고, 디테일한 옵션까지 꼼꼼하게 주문하는 손님 부류가 있는데 바로 2030 여성 손님들이다. 연하게, 덜 달게, 얼음 빼고 등등 구체적으로 요구하시고, 가끔은 커피에 샷이 몇 개 들어가는지까지 물어보시고는 1.5샷 등으로 꼼꼼하게 챙기시기도 한다. 경험상 2030 여성 손님들은 디테일한 취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예외는 있다.)


수십 가지의 카페 메뉴 중 어떤 것을 마실지 고르는 방법이 제각각인 것을 보다가, 문득 인생도 카페에서 메뉴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삶의 갈림길에서 중년의 아저씨들처럼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선택해 왔던 것 같다. 고등학교 진학할 때 예고 문예창작과에 지원해보고 싶은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의 뜻대로 동네에서 공부 빡세게 시키기로 유명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대학 잘 보내기로 소문난 학교였던지라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3년을 보냈고, ‘해야 하는 것’을 쳐내다 보면 ‘하고 싶은 것’은 내 삶에 없는 옵션이었다.


졸업하고 알게 된 건데 생각보다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오히려 성적이 떨어지거나, 심리적 트라우마까지 겪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것을 보면 나는 시키는 대로 사는 게 성향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비록 성적은 학교에서 외면당했지만, 그래도 말은 잘 들어서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니.


하지만 그렇게 시키는 대로만 살다 보니, 막상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뭘까?' 하고 물어보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살아갈수록 자꾸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 사는 게 적성에 안 맞는지도..?’


착하게 말 잘 듣고 사는 게 정답인 줄 알았더니, 스무 살이 되니 갑자기 밑그림 없는 하얀 도화지가 스윽 주어졌다. 이게 내 인생이라면서. 내가 그리는 대로 내 인생이 되는 거란다. 내 인생이 어떻게 그려질지는 온전히 내 책임이란다..! 살아갈수록 하얀 도화지를 내 뜻대로 채우는 일이 설레고 황홀하기보다는 무섭고 두렵다. 정답이 없는 삶이라니, 그게 뭔데! 어떻게 사는 건데!


바리스타로 일할 땐 디테일하고 까다롭게 주문하는 손님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것을 인생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오히려 부럽고 멋져 보인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잘 알고, 주변 상황을 자신에게 맞게 조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나도 이제 그런 사람이고 싶다.

주는 대로 먹고, 맛없으면 ‘운이 별로였네’ 하는 사람보다는 결국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고를 수 있는 사람.


사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오늘도 내 삶의 메뉴를 천천히 골라보려 한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keyword
이전 16화카페 사장이 되려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