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역가였다. 대학 졸업 후 뛰어든 취업의 문턱에서 프리랜서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 내가 가장 처음 시작한 일은 한국 굴지의 대기업의 협력사에서 외신 동향을 보고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 일을 택한 이유는 오후 4시에 업무를 마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해보니 간단히 말하자면 하루에 마감이 4번 있었다. 11시, 1시 20분, 3시, 4시.
마감을 겪어 본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하루에 마감 4번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게다가 독어권은 나라 종특인지 언론사가 정말 많다. 그 말인즉슨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굴러야 한다는 뜻이다.
하루에 보통 2000~2500개의 기사를 체크하고 선별하고 처내고 번역하고 보고서를 쓰는 일이 숨 가쁘게 돌아간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회사 제품이 터진 날 내 일거리도 터졌다. 그 날 최고 기록을 세웠다. 관련 기사 4천 개. 그런데 그 와중에 기업에서 원하는 이슈를 담은 기사는 무조건 놓치면 안 된다. 아무리 바빠도 번역 질도 좋아야 한다. 놓치면 역적이고 틀리면 죄인이다. 주말 동안 쌓인 기사는 월요일 오전 7시부터 2시간 만에 재빠르게 선별하여 약식으로 보고서를 써서 9시에 “슈퍼 갑”님의 책상에 올려져야 한다. 금요일 퇴근 때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거의 3일이 되는 시간 동안 쌓인 기사는 주요한 것만 진행해도 3천 개다. 2시간 만에 뚝딱 보고서까지 만들어 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자연히 내 업무는 일요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이 일이 2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들이 번역사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기계로 보기 때문이다. 정밀 기계도 아니고 돈 넣고 버튼 누르면 띵 나오는 자판기.
초반 6개월은 정말 내 뇌를 모두 쥐어짜서 미친 듯이 해서 마감에 맞췄다. 놓치지도 않았고, 틀리지도 않았다. “슈퍼갑”님이 친히 이슈 선정부터 보고서까지 너무 만족스럽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그러나 저 밑바닥에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고 나니 더 이상 낼 힘이 없었다. 업무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늘었다. 4시였던 퇴근 시간은 나 혼자 5시, 5시 반으로 늘어났다. 업무가 끝나고 나면 매일이 번아웃이었다. TV를 보아도, 밥을 먹을 때도 나머지 일상에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회사에도 이틀 출근을 해야 했고 과외도 하나 하고 있어서, 그 일상생활에서 일과 필수적인 활동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일해도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은 200만 원 중반 대였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니 성격이 날카로워졌다. 일요일 저녁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이슈를 하나 놓쳤다. 경위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왜 그 기사를 놓쳤는지 이유를 말하라고 하는데, 쓸 말이 없었다. 왜 놓쳤을까, 왜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걸 왜 못 봤을까.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그렇게 일을 하면 누구든 놓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업무량이 감당할 수 없게 많으면 실수는 줄어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내가 무능해서, 내가 집중을 못해서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슈퍼갑은 절대적이었고, 회사는 나의 고용주였고, 그들이 원하는 요구조건을 달하지 못하는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게 또 한번 실수가 나오자 나는 업무가 끝나고도 혹시 놓친 기사가 있을까 봐 불안해서 보고 또 봤다. 몸은 퇴근했는데, 정신은 항상 불안에 쫓겨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퇴근길이자 다른 회사로 출근하는 출근길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그 날의 업무를 잘 마쳤고, 문제도 없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너무 힘들다” 그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그만두겠다고 말을 했다. 일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1년은 넘게 하는 사람이었어서, 그 일도 아등바등 1년을 채우려고 했지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금은 특이했던 외신 번역일을 그만두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통번역 대학원에 다니는 절친이 나에게 통번역 대학원을 권해줬다. 통번역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입학은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몸 값이 3배로 뛰기에, 이미 통번역 업계에서 십 년 넘게 종사한 사람들도 거의 고시 공부하듯이 하루 종일 미친 듯이 공부해서 들어가는 곳이다. 기본 준비 기간이 1년이었다. 재수 삼수하는 사람들도 많다. 고시 공부하는데 아르바이트를 못하듯 준비 기간 동안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합격한다 해도 전문대학원이라 2년 등록금이 4년 학부 등록금과 맞먹는다. 일반대학원과 달리 전문대학원은 학자금 대출도 할 수 없다.
입학하고 나서도 입시 공부할 때보다 더 힘들게 2년을 공부한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통학시간이 아까워 이문동에서 자취를 한다고 한다. 졸업을 하고 싶다면 정기적인 경제활동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최소 3년의 생활비+수 천만 원의 등록금+현재 학자금 대출까지. 통번역 대학원이라는 선택지는 시작도 되지 못하고 내 미래에서 삭제되었다.
결국 나는 국내 독일어 번역 시장에 9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기술 번역 시장에 뛰어들었다. 수요가 많았고 진입장벽도 다른 분야에 비해 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대로 된 일을 받기까지 4개월 정도가 흘렀고, 나와 계약해서 일을 주는 회사도 이제 어느 정도 내 실력에 확신이 생기기 시작하자 일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문과 머리다. 내 머리에서 이과가 차지하는 비율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전공자, 기술자들이 보는 문서를 번역해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한 글은 독자도 이해하지 못한다. 가끔 그냥 쉽게 두 언어 다 잘하니까 통 번역하면 되겠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데, 세상사 그렇게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한국어와 100% 1:1 대응이 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통번역은 언어 실력은 기본 바탕이고 그 나라의 문화는 물론이요, 배경지식, 문맥을 파악하는 능력, 원어민이 거지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게 고쳐내는 논리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잠시 삼천포로 세자면, 요새는 파파고한테 시키면 되지 하고 통번역을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서 하는 말인데. 당신이 공항 검색대에서 평소 복용하는 안정제를 설명하고 싶어 파파고한테 “안정제”가 영어로 뭐냐고 물으면 “Stabilizer”라고 대답해줄 것이다. Stabilizer 먹으면 골로 간다. 그건 기계 용이다. AI가 동백꽃 점순이가 “느 집엔 이거 없지”라고 말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치기 어린 애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쨌든 다시 돌아오자면 이 시장은 거의 단어당 요율이 책정된다. 이천 단어 정도의 작은 작업으로 시작해, 만단어부터 최대 삼만 팔천 단어까지 큰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큰 일을 해야 돈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산업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기술 번역 시장의 납기일은 특히 대기업이 고객사면 말도 안 되게 짧다. 에이포 용지 한 장에 보통 330 단어를 기준으로 잡는다. 2만 단어 작업 파일이라고 하면 60장이다. 에이포 용지 60장의 기술 문서, 그러니까 “가변 유압 실린더는 휠 아치 내 스프링/댐퍼 요소 영역에 위치해 있으며, 일반적으로 스태빌라이저를 연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결봉을 대체합니다.”와 같은 내용의 문서를 60장을 번역해야 한다.
2만 단어 번역에 주어지는 마감기한은 대게 일주일에서 길어야 열흘 정도다. 프로그램을 사용한다지만, 초벌-검토-퇴고의 과정을 거치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마감이 시작되면 나의 일과는 이랬다. 아침 9시에 눈을 뜨자마자 눈곱을 떼고 컴퓨터를 켠다. 부팅이 될 동안 세수하고 커피를 타 와서 앉아서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꼼짝도 안 하고 일을 하다 보면 점심때다. 밥 챙겨 먹을 시간은 없다. 엄마나 챙겨줄 누군가가 있으면 한 그릇 음식 같은 간단한 음식을 내 책상에 가져다줄 때도 있고 아무도 없으면 너무 허기가 질 때 일어나 빵 하나를 가져온다. 일을 하면서 컴퓨터 책상에서 밥을 먹는다. 삼십 분쯤 후에 일어나서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커피와 물을 리필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다시 앉는다.
일한다. 일한다. 일한다. 아, 구글에 검색해도 검색 결과가 없는 단어가 출몰했다. 단어를 쪼개서 찾아도 보고 다른 말도 붙여서 검색해봤지만, 아무것도 안 나온다. 망했다. 최대한 문맥 속에서 뜻을 유추해보고자 몸부림친다. 그렇게 삼사십 분이 훅 지나간다. 결국 한 시간을 낑낑대다가 그 단어를 마뜩찮은 번역으로 남겨두고 계속 진도를 나간다. 아뿔싸,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마음이 바빠진다. 그런데 커피 때문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다.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면서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지금 갈까? 아니야 이 문장만 하고 가자, 아 싸겠다. 안 돼! 이 문단만 끝내자.’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왔을 때 화장실로 달려간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일어나는데 무릎이 굳은 느낌이다. 손으로 책상을 잡고 천천히 펴야 한다. 그냥 훅 일어났다가 힘이 안 들어가서 주저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녁시간까지 미친듯이 일을 한다. 중간중간 엄마가 말을 건넨다. 엄마는 내가 일하는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일하면서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여유는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런 엄마의 말에 내 입은 “응”. “아니”, “아 진짜?”를 기계적으로 내뱉는다. 나는 모니터 안에서 일분이 아까운 전쟁 중인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재택근무자의 숙명이다. 사실 앞서 초벌-검토-퇴고라고 썼지만 퇴고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한 번 할 때 잘해야 한다. 양이 너무 많아서 그걸 하나하나 보면서 고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즉, 매 단어, 매 문장, 매 순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엄마는 섭섭해하지만, 그 스트레스 안에서 기계적으로라도 엄마에게 대답을 해주는 것이 엄청난 효심임을 부디 우리 엄마가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저녁시간이 됐다. 이쯤 되면 현타가 온다. ‘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밥도 밥상에서 못 먹나.’하는 생각에 번역하던 부분을 마무리하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다. 뒷정리를 마치고 스트레칭을 한 번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가족들이 모두 귀가했기에 생활 소음은 당연한 부분이라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문을 닫고 음악을 튼다.
어느새 모두 잠이 들어 조용하다. 그때가 되면 오히려 내 소리가 조심스러워져서 음악을 끄고 타자도 좀 살살 친다. (10시간째가 넘어가면 나도 모르게 타자 소리가 커진다. 공격성이 높아지나…)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목을 돌리면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다. 내일도 계속 일을 해야 하니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씻고 침대에 눕는다. 거의 16시간을 블루라이트를 봤기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관자놀이와 미간을 꾹꾹 눌러가면서 잠을 청한다. 결국 새벽 3시쯤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날 9시 알람 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난다. 또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다. 그리고 점점 마감날이 다가오면 자는 시간이 점점 더 늦어진다. 이 일상을 10일에서 2주, 너무 큰 작업 같은 경우는 3주를 한다. 대개 마감시간은 아침 9시이다. 마감 마지막 날은 작업을 다 끝내고 최종 검토를 하고 파일을 전송하면 새벽 3시나 4시 최고는 5시 반이었다. 그렇게 납기를 마치면 씻을 힘도 없이 그대로 눈감고 침대로 쓰러진다. 일어나 보면 점심때다. 이렇게 생명을 깎아 일하면 돈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2만 단어 파일을 해봐야 150만 원을 벌까 말까다. 회사마다 요율이 다른데, 내가 계약했던 회사는 그래도 요율이 좋은 편이었는데도 그 정도였다. 독일어는 그래도 아랍어 같은 희귀 언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특수 언어에 들어가서 대중적인 언어들보다 요율이 높은 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 번역가들의 페이는 이것보다 더 짠 경우가 수두룩할 것이라 추측해본다.
마감을 하나 끝내면 새 일이 들어올 때까지는 그야말로 프리다. 직장인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평일 오전에 카페가기도 할 수 있고, 서점도 가고 근교로 여행도 갈 수 있다. 이 기간이 프리랜서의 장점이다. 하지만 이 기간이 길어지면 그냥 백수다.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노트북은 언제 어디 가나 필수다.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들어온 일이 내일도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에 대부분의 프리랜서들은 어떻게든 의뢰받은 일을 다 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늘 그렇듯 마감 기한은 짧다. 내 모든 일상은 그 마감을 맞추기 위해 돌아간다. 이렇게 일하고 떼 돈이나 벌면 그래도 돈이라도 많이 번다하겠지만, 대부분의 프리랜서 기술 번역가들은 평범한 다른 중소기업 회사원들처럼, 생활비, 얼마의 저금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학자금 대출을 내고 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몇십만 원이 되지 않는다.
4대 보험이 될 리가 없기에 지역가입자로 의료보험, 국민연금을 모두 내가 납부해야 하고, 갑자기 일이 끊겨도 실업 급여는 언감생심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 프리랜서는 일은 하나 노동자는 아닌 존재라고 보면 된다. 나 아니어도 일할 번역가들은 많고, 지금도 신규 번역사들은 계속 유입된다. 연봉 협상하듯 내 요율도 경력이 쌓일수록 올라가야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10년을 일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다. 최저 임금이 올라도, 물가가 올라도, 프리랜서들의 단가는 절대 오르지 않고, 아무리 잘해도 인센티브나 보너스는 꿈도 못 꾼다. 프리랜서는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서 그렇다고 하면 맞다. 그렇지만 무슨 일 터졌을 때 회사 입장에서 뒤집어 씌우기 가장 좋은 대상도 프리랜서다. “네가 억울하든 말든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까 넌, 계약해지” 하면 끝이다. 어차피 다른 프리랜서 발에 채일만큼 많으니까.
결국, 기술 번역 시장에서도 번역가는 자판기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이런 숨 막히는 마감, 하루 16시간의 노동, 그리고 이 처지가 나아질 리가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까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자연스레 번역 퀄리티가 낮아진다. 맨 처음 했던 일과 마찬가지의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잠자고, 먹고, 싸고 정말 꼭 해야 하는 기본 욕구만 겨우 채운 채 나머지 시간은 계속 집중해서 일을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없고, 마감은 늘 급박하고, 그러다 보면 고민은 사치다. 최대한 빠르게 한 문장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문장은 최대한 직관적이면서도 모호해진다.
그리고 스스로 처음 번역을 시작하던 열정 넘치던 나와 이렇게 변해버린 나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 혐오에 빠진다. 매일매일 독일어를 읽고 독해하고 번역하는데, 내 회화실력은 계속 떨어진다. 언어는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가 모두 다 다른 영역이라 내가 아무리 읽고 써봤자 말하기 연습을 안 하면 말을 못 한다. 점점 퇴화되는 회화 실력에 일을 안 할 때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하지만 마감 중에는 하루에 하는 한국말도 손이 꼽히는 수준이고, 죽기 살기로 마감을 끝내면 뭘 할 힘도 없고 독일어의 ‘ㄷ’만 봐도 신물이 올라온다. 독일에 산다면, 독일인 친구랑 만나서 시간을 보낸다거나 하면서 회화 연습을 하겠지만, 한국에서 회화 실력을 유지하려면 정말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힘도 노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일상이 쌓이면 결국 독일어 회화를 못하는 독일어 번역가라는 기괴한 대상이 탄생한다. 내가 학부생 때 “아니, 저 사람은 번역가라면서, 독일어를 저렇게 못해?”하며 경멸하던 대상이 내가 되어있다. 자괴감은 날로 커지고 내 몸도 점점 고장이 나간다. 장시간 앉아 있으면 허리부터 나간다. 그리고 무릎, 손목, 손가락, 팔꿈치 관절이 다 혹사당한다. 혈액순환 장애는 덤이다. 그리고 매번 바뀌는 밤낮에 수면 장애는 거의 배우자 수준이다.
신체가 망가지면 정신도 망가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마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데, 몸이 아파 능률이 떨어지고 자연스레 번역 퀄리티가 떨어지면 당장에 주의가 날아든다. 사실 나를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들도 업무 강도는 나와 도긴개긴이라 그들의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 계속되는 마감의 나날들이 지나가다 보면, 어느새 만성 비타민D 부족 환자에, “절대 치형 엔코더” 같은 단어의 독일어만 알고 일상 회화를 잊어가는 나라는 존재에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긴급 건 입니다.” 라는 메시지를 보면서 “긴급이라고 분명 고객한테 돈 더 많이 받았을 텐데, 왜 내 요율은 변함이 없나” 환멸을 느낀다. 열심히 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가중된 업무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없으니 번역을 날려서 한다. 결과물에 만족을 못하니 자신만 탓하게 된다. “내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독일어를 못해서, 내가 번역을 못해서, 내가 문제라서”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술 번역가로 2년을 살고 나는 망가졌다. 수면장애와 더불어 가끔 눈을 감으면 그냥 남을 해치는 장면이 떠오를 때도 있고, 내가 차에 치이는 상상을 하거나, 자려고 누우면 잠 못 들다가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손톱으로 내 팔을 긁거나 손톱 밑을 계속 눌러서 손톱자국이 나곤 했다. 번역을 하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았다. 나 자신도 문제가 있다고 느껴서 문학치료 공부를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다 그만두고 산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늘 현실은 도망도 가지 않고 내 앞에 버티고 있다. 한국에서 여자 나이 29, 어디에 신입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이거 아니면 내가 뭘 해 먹고 사나 막막한데. 내 상태는 갈수록 심해졌고 그 상태는 내 번역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거리가 줄기 시작했다. 알았다. 여기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일을 계속할 수 없음을. 그런데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작은 번역 작업만 받았고, 이 일과 병행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정신을 좀 먹은 그 알 수 없는 것은 나를 떠나지 않았고, 최소한의 생활비만 버는 정도로 일을 했다. 아니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일로 버는 수입이 번역 수입을 초월했는데도 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자동적으로 “번역이요”라고 말을 했다. 번역은 내 꿈이었고, 나는 그 꿈을 이뤘고 하지만 나는 버티지 못했고, 그래서 이내 번역이 증오스러워졌는데도, 나는 여전히 나에게 번역가였다. 버티지 못한 실패한 번역가.
결국 나는 모든 걸 다 놓고 빈털터리로 뉴질랜드에 왔다. 그리고 여기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로 한 전날 잠이 오지 않아서 생각에 빠졌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나 번역가를 그만두어야겠다. 사실 뉴질랜드에 오면서 제대로 된 번역을 한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데도, 나는 아직도 무의식 중에 내가 번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증오하고 그렇게 힘들었는데.
번역가가 아닌 나도 내가 될 수 있었다. 번역가로서 그 시장 노동환경을 버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계속 나를 실패자, 패배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사람마다 제각기 맞는 속도와 방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풍하절이 다 지난 5월의 어느 가을밤. 까만 어둠 사이에서 번역가를 그만두었다. 내 인생은 아직도 한 치 앞을 모른다. 너무 깜깜하다. 삼십 대 초반에 돈도 직업도 없는 나, 앞으로 뭘 해 먹고살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나. 그러나 오늘 나는 릴케의 시를 생각해본다.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떼어 내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꽃잎으로 손을 내밀뿐
-라이너 마리아 릴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