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운다. 새벽 4시 50분인 모양이다. 오늘은 ‘2023년 9월 18일, 9월의 세 번째 월요일, ‘경로의 날’ 휴일이라 다카오산(高尾山)에 다녀올 예정이다. 평소처럼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시고 혈압부터 잰다. 기상 시 혈압이 130 이하가 되면 혈압약을 끊기로 주치의 니시모토(西本) 선생님과 의논되어 혈압계도 구입하여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재고 있다. 수축기 혈압 145, 이완기 혈압 103, 맥박 58이다. 왜 이리 높지? 평소에는 혈압이 130/80에 맥박 60 정도였는데, 혈압이 너무 높고, 맥박이 조금 적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번 재 본다. 이번에는 132/88-60, 평소와 비슷한 수치다. 조금 전에는 측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물 1.5리터, 비상식량, 의류 등 준비물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려고 하는데딱딱한 무엇인가가 손에 잡힌다.꺼내 보니 호루라기다. 백 엔 샵에서 산 것인데, 산행이나 지진으로 엘리베이터 등에 혼자 고립되었을 때를 대비한 비상용이다. 히마리가 놀러 오면 가지고 잘 놀았던 것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바로 다시 사지 못할까 싶어 서울로 보내는 히마리 이삿짐 속에 넣지 않고 빼 두었던 것이다. 꺼내기 쉽도록 배낭의 멜빵 앞쪽 허리 포켓에 잘 넣고집을 나섰다.
오늘 도쿄 시내 예상최고 기온은 33도. 다음 주가 추석이고, 9월 중순인데 아직 한여름처럼 덥다. 8월 도쿄 기온은 하루도 빠짐없이 30도를 넘는 마나츠비(真夏日)가 계속되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8월이었다고 한다. 엘리뇨로 10월에도 더위는 계속될 것이라는 3개월 예보도 이미 발표되어 있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599m의 다카오산(高尾山)을 넘어 670m의 고보도케시로야마(小仏城山)까지만 갔다가 내려와야겠다.
신주쿠(新宿)에서 게이오선(京王線)으로 갈아타면서 준비해 간 삼각 김밥을 먹었다. 본래 전철(역)에서는 식음을 하면 안 된다. 그러나 다카오산 등산객들이 대부분인 아침 시간의 다카오행 게이오선(京王線)에서는 용서가 된다. 7시 30분, 다카오산구치(高尾山口) 역에 내려 등산을 시작했다. 3 연휴 마지막 날이라 가족 단위 등산객이 많다. 익숙한 6호로(号路)로 정상을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그리 덥지는 않다. 정상에 오르니 날씨는 맑은데 후지산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보이더니 금방 사라졌네! “
조금 전 까지는 다카오산 정상에서 후지산을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후지산은 늘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후지산 사진을 찍으려면 마음먹었을 때, 보일 때 바로 찍어야 된다. 나중에 찍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 거의 실패한다. 구름에 가려진 후지산을 배경으로 히마리네가 준 텀블러 사진을 찍었다. 지난주 서울 출장 때가 마침 天仁의 생일이었는데, “산행 때 시원한 음료를 넣어 드세요. “라고 하며 히마리가 건네준 것이다. 연인으로 보이는 20대 남녀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산행할 때 시원한 음료 넣어 드세요 “~히마리네의 생일 선물.
고보도케시로야마(小仏城山) 정상입구에서는 좌측우회로를 택했다. 일본의 등산로 정상 부근에 있는 우회로는 온나자카(女坂), 바로 치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오토코자카(男坂) 라고 부른다. 좌측 우회로가 길이 평탄하고 정상까지 해를 보지 않고 새소리를 들을 수 있어 이 산에서 天仁은 늘 이 길로 다닌다. 1백 미터쯤 들어가니 잔돌이 조금 줄어든다. 가방을 내리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었다. 맨발 걷기를 시작해 본다. 흙길처럼 보여도 잔돌이 많은지 발이 아프다. 바닥의 상태를 봐 가면서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백 미터쯤 걸어갔나 싶은 데 뱀이 등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들며 갑자기 땅이 솟아오른다. 지진인가? 나무라도 잡으려는데 잡을 수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순식간에 고꾸라져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 주변을 살펴보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진이 아니다. 폭이 1m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길의 좌측은 가파른 낭떠러지인데 운 좋게도 오른쪽 산 등성이로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몸과 다리에 힘을 넣을 수가 없다. 순간 문득, “뇌경색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심혈관 관련 건강서적의 내용이 떠 오른다. 만약 뇌경색이라면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 119에 신고하려고 포켓에서 핸드폰을 꺼내려고 하는데 손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왼손과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우선 도와줄 사람을 불러 보기로 했다.
“다스케테구다사이(도와주세요, 助けてください!), 다스케테구다사이! “
몇 번 큰 소리를 질렀는데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문득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배낭 속에서 꺼내 벨트 포켓에 넣어 둔 호루라기가 생각난다. 힘들게 오른손을 몇 번이나 뻗고 또 뻗어 호루라기를 꺼냈다. 그리고, 힘껏 세 번을 불었다. 몸이 축 늘어진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가 좋지 않으세요? “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보니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나중에 알았지만 다카다高田 씨)가 머리맡에 앉아 天仁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음이 바쁜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산에는 구급대가 없는 모양이다. 다카다 씨에게 배낭 속의 비상용 잠바를 꺼내 입혀 주고, 天仁 핸드폰에서 장금한의원을 찾아 우종택원장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휴일인데도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으신다. 우원장님은 신오오쿠보 코리안타운에서 한방병원을 운영 중이신데, 天仁을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신다.
“아프면 당연히 오시고, 피곤하기만 해도 바로 오세요. 늦으면 병을 키웁니다. 현대의학은 사고 후에 필요하고 한방은 병에 걸리지 않도록 사고 전부터 병에 걸리지 않도록 근원을 치료합니다. “ 자주 하시는 말씀이다. 우원장님은 현대의학 지식도 풍부한 분이다. TV 출연 등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해상자위대의 의료고문이시기도 하다.
“뇌경색인 것 같네요. 1분 1초라도 빨리 뇌신경과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구급대원들이 병원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우뇌를 다친 것 같은데, 좌반신 마비는 재활치료받으면 완치돼요. 天仁 후배님은 건강하니 치료받으면 빨리 회복될 거예요. 전화 잘했어요. 마침 집에서 쉬고 있으니 병원 도착하면 상황 봐서 다시 연락 줘요. “
구급대를 기다리며 누워있는데, 자력으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왼손이 오른팔을 주무르고 있다. 힘도 꽤 세다. 이상한 일이다. "이거 뭐지? 나는 오른팔을 주무를 생각이 없는데?" 물론 天仁의 의지가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더 굳어질 것 같아, 바닥에서 성냥개비 만한 나무 잔가지를 주워 왼손 손가락 끝을 자극한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구급대가 도착했다. 경찰관도 두 명이 함께 왔다. 다카다 씨가 경찰청 110으로 신고를 했더란다. 시스템이 바뀌어 110에 신고하면 자동으로 119에도 신고내용이 접수된다고 한다. 天仁도 몰랐던 사실이다.
경찰관이 신고 접수 서류 작성을 위해 天仁의 신분증을 확인하더니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지원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 준다. 만약 차량 이동에 문제가 있으면 엠뷸런스를 에스코트하겠다고 한다. 순간, 안도감과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돈다. 다카다 씨가 제대로 신고를 해 준 것 같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구급대원이 가지고 온 장비로 혈압을 쟀다. 156/106이 나온다고 한다. 너무 높다. 문제는 여기가 너무 좁은 비탈길이라 들것이 들어오지 못해 큰길 입구까지는 업고 나가야 한다고 한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시하시(石橋) 대원이 자기가 天仁을 업겠다고 나선다. 체구는 작은데, 마른 몸이 근육으로 뭉쳐져 아주 탄탄해 보인다. 고맙다.
업는 방법도 특이하다. 아이 업듯이 업는 것이 아니라 天仁을 구급대원 배낭에 앉히더니 天仁의 양다리를 멜빵 사이에 통과시켜 배낭을 멘다. 그러니 天仁의 몸도 배낭과 함께 이시하시대원 몸과 완전히 고정되었다. 그야말로 삼위일체, 떨어질 염려가 없다.
업혀서 비탈길을 올라 고보도케시로야마(小仏城山) 정상으로 가는 큰길로 나갔다. 구급대원 10여 명이 축구장, 스키장에서 본 것 같은 들것을 준비해서 대기하고 있다. "하치오우지 미나미(八王子南) 소방서 3팀에서 왔습니다"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아 들것에 누우니 벨트를 채우고 좌우측 3명씩 6 명이 들것을 들고 빠르게 움직인다. 다카오산 정상의 비지터 센터 앞 임도에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좀 더 안심이 된다.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히마리의 부드러운 볼처럼 감미롭다. 힘들게 고생하는 대원들께는 죄송하지만 들것에 누워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잣나무 위의 하늘을 보니 아름답게까지 느껴진다.
20분 정도 걸려 다카오산 정상의 비지터 센터에 도착했다. 센터 앞에는 봉고차 모양의 왜건 타입의 중형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다. 임도 경사가 심해 큰 앰뷸런스가 올라오지 못해 산 아래로 내려가서 큰 앰뷸런스로 갈아타고 병원으로 간다고 한다.
산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큰 앰뷸런스에 天仁을 옮겨 태워준다. 앰뷸런스가 출발했다.
“어느 병원으로 가나요?”
“미나미타마 종합병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이 휴일이라 전문의가 없는 병원이 많고, 전문의가 계신 곳은 베드가 없어 받을 수 없다는 곳도 있는데 미나미 타마는 응급실에 내과 전문의 선생도 계시고 베드 여분도 있다고 합니다.”
“미나미타마는 뇌신경외과도 있는 병원인가요?
”뇌신경외과는 없습니다. “
“죄송하지만 뇌 신경과가 있는 병원으로 가고 싶습니다.”
“뇌 신경과가 있는 병원은 가까운 곳에는 없고 좀 멉니다. 40분쯤 걸리는 곳에 국립사이가이진료센터(国立災害医療センター)가 있습니다만. “
“네, 거기로 가 주십시오. “
사이가이 병원과 다시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天仁의 성별, 나이, 혈압, 맥박, 체온 등의 인적사항과 현재의 증상을 알려주고 있다. 와도 된다고 하는 모양이다.
“주소는 도쿄 시내, 의식도 있고, 한국 국적의 외국인인데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없습니다. “ 외국인이 응급으로 온 적이 많지 않았던지 병원에서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담당대원이 본부에 다시 무선을 보내는 소리가 들린다.
“3호차, 환자 본인의 강력한 요구로 목적지를 미나미타마에서 국립사이가이 의료센터로 변경합니다. 미나미타마 종합병원 예약 취소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