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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꼴라쥬 May 27. 2020

인생은 정성스런 잡곡밥 한 그릇과도 같다.

저녁을 먹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그릇의 잡곡밥과도 같구나.'


늘 그래 왔듯 무심하게 밥을 먹다 보면, 이따금 좋아하지 않는 크고 둥그런 콩알이 바윗 덩이가 내려앉듯 입안으로 굴러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되는데.. 이럴 때의 나는, 아예 처음부터 밥그릇의 콩들을 모두 골라내어 구석에 모아뒀다가 밥을 다 먹고 나중에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버리거나, 아님 처음부터 적을 처단하듯 하나씩 하나씩 색출해낸 콩들을 모두 처형한 후에야 제대로 된 식사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것이 있다. 콩알을 어금니로 사정없이 처단하는 과정에서 입속에서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콩들이 뿜어내는 맛의 미학. 가끔씩은 처음 콩알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 것이 미안할 정도의 고소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잡곡밥 속의 콩들을 보면 인상부터 쓰게 되는 아이러니함이란.


크기가 너무 작아 평소엔 그다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좁쌀의 존재감이 유난히 와 닿는 날도 있다. 사이즈가 작은 조를 빻아 만든, 사이즈가 너무 작아 우리네 실생활에서도 작은 녀석들을 놀려댈 때 자주 등장하는 그 이름, 좁쌀. 그러나 쌀을 씻을 때에도 쌀뜨물에 함께 모두 쓸려내려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아 다른 잡곡들 사이에서 제대로 자리 잡는 강인한 녀석이다. 검고 붉고 초록의 잡곡들 속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봄날의 개나리 같은 좁쌀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이따금 잡곡밥을 먹다 토도독 녀석의 존재감이 입안에서 느껴질 때면 기분 좋은 첫사랑의 설렘과 이따금 찾아오는 삶의 이벤트가 떠오른다고나 할까.


잠시 생각을 멀리로 보내고 수저를 뜨다 (적어도 나의) 잡곡밥에 초대하고 싶지 않은 붉은빛의 퍽퍽한 팥을 만나게 된다. 보기만 해도 다소 부담스러운 붉은빛의 팥은,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식감 또한 내게는 살짝 어려운 녀석이다. 그럼에도 팥을 골라내어 내쳐버릴 수 없음은 정성스레 한 그릇의 밥을 내어주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두 눈 질끈 감고 애써 녀석을 외면하며 다른 잡곡들 사이에 녀석을 은폐한 채 입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잡곡밥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갑자기 무릎을 ! 치며, 깨닫는다.


여러 잡곡들이 모여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과 식감을 선보이고 있지만, 정작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백미는 이미 오래전에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듯 보이지만..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뜬금없는 음표들의 집합체로 보이는 잡곡밥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변주곡으로 보이는 데는, 백미 본연의 고결하고 부드러운 존재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잡곡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라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백미라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어떠한 환경에서건 삶은 나의 취향과 선택을 바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일어나는 변수와 이벤트에만 관심을 두고, 정작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본연의 일상은 무심히 지나쳐왔던 건 아닐까. 밥을 먹다 말고 잡곡밥 속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여느 아이가 그렇듯 나 또한 어린 시절엔 잡곡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절 보리밥이라도 밥상에 오를라치면 절레절레 손사래를 치며 한 끼 식사를 거부하곤 했던 나였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잡곡밥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게 되고, 이제는 잡곡밥 속에서 건강을 지키기 위한 영양분을, 인생의 진리를 찾게 되는 요즘이다. 이제는 조금은 거친 식감의 현미도 좋고, 배려 없이 제멋대로 주변을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검은 쌀도 좋다. 멀리에서 입소문을 타고 온 퀴노아도 렌틸콩도 아마란스도.. 모두 나름의 맛과 느낌이 있어 참 좋다.


그러다 문득,

수저를 내려놓다 말고 순간 쓰잘머리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인생에 있어 백미 일색의 달달한 부드러움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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