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화사한 3월의 오후였다. 이날은 기사를 배정받지 않아 몸도 마음도 한껏 여유로웠다. 종로경찰서 주변 인사동 거리를 거닐다 문득 커피 한 잔이 생각났다. 적당히 여유로운 카페 테라스에 앉아 오후 보고를 할 참이었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이었다. 뜬금없이 경북 칠곡에 며칠 출장을 가란다. 하필 그날 저녁부터 약속이 빼곡했다. 은근히 기대한 자리들이었다. 하지만 약속을 핑계로 출장을 거부할 순 없었다.
집에 들러 짐을 챙겨야 했다. 큰 배낭에 노트북과 속옷·양말 3일 치와 간단한 세면도구를 넣었다. 오가며 읽을 책 한 권도 챙겼다. 그리고 현장에서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3년 전 강원도 산불 출장이 떠올랐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큰 산불이 났으니 얼른 강릉으로 가야겠다'는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튀어갔다. 정말 엄청난 산불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가지 못해 취재 내내 단벌로 버텨야 했다. 비싼 수제구두는 잿가루 범벅이 됐고 슈트와 트렌치코트엔 매캐한 연기가 그득 베었다. 그 후로 비싼 옷을 사지 않는다.
배낭을 메고 나오니 슬슬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남들은 퇴근할 시간에 회사로 향하자니 좀 쓸쓸해졌다. 같이 출장 가는 후배와 만나 저녁을 먹는데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딱 한 병을 시켜 후배와 나눠 마셨다.
며칠 전 칠곡에서 20대 두 명이 친구 한 명을 때려 숨지게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피의자들은 상해치사 혐의로 체포됐고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알려졌다. 후속기사는 없었다. 그런데 데스크 정보에 따르면 경찰은 이후 피의자들에게 '중감금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친구들이 한 빌라에 세 들어 수개월간 합숙하면서 한 명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다 끝내 숨지게 해다는 것이다. 데스크는 '마포 오피스텔 살인사건'이나 '강서구 부동산 분양 합숙소 사건'보다 끔찍한 건이라며 열을 올렸다.
막막한 마음에 목구멍이 따갑도록 맥주를 들이켰다. 정보는 이게 끝이었다. 사건 현장 주소도 피해자 유족 연락처도 어느 하나 파악된 게 없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출장은 결정된 일이었다. 회사차를 타고 어두컴컴한 밤을 달렸다. 넉넉잡아 4시간 거리였다. 칠곡에 도착해 뭐라도 해내려면 이동하는 동안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담당 경찰서 과장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경찰서장도 답이 없었다. 내친김에 경상북도 경찰청에도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생각보다 친절했지만 수사 일선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까진 알지 못했다.
경찰쪽에서 정보를 얻어낼 수 없다면 피해자 측을 접촉하는 게 관건이었다. 유족은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살인사건의 유족과 접촉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아슬아슬했다. 피해자의 발인이 아직이길 바라야 했다. 물론 그 사이 부검을 했다면 일정이 하루 정도 늦춰졌을 순 있었다. 장례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야밤에라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피해자 빈소가 어느 장례식장에 차려졌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피해자 이름도 몰랐다. 근처 장례식장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최근 20대 초반의 망자가 있었느냐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구미시까지 범위를 넓혀 알아보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선배 찾았습니다."
후배가 구미 모 대학병원에 피해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망자가 있다는 사살을 확인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경찰에게 문자로 슬쩍 떠봤더니 잠시 후 전화가 걸려온다. 그는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느냐"며 투덜거렸다. 빙고였다. 그 병원을 통해 화장 일정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더라도 유족을 만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방법은 없다. 일일이 붙잡고 물어보는 수밖에. 하지만 무조건 찾아내야 했다.
칠곡의 한 모텔. 이곳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일을 한 투숙객이 몇이나 될까 / 직접 촬영밤10시쯤 칠곡에 도착했다. 내 마음은 칠흑 같은 밤하늘보다 더 깜깜했다. 오늘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편의점에서 소주와 과자를 사고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함께 간 영상취재팀과 한 방에 모여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마셨다. 앞으로의 출장에 대해 결의를 다지는 시간이랄까. 취기가 돌자 그나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한 뒤 싸구려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매트리스는 딱딱하고 이불은 뻣뻣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칠곡에서의 첫날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