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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센트 Oct 30. 2022

(2)

용산에서 목포까지 가는 표를 끊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만 벗어나면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지평선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열차가 역에 정차할 때마다 해원의 상상에 금이 갔다. 생각보다 번화하고 번잡한 분위기에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출입문 문턱까지 밟았다 돌아서기를 여러 번, 이대로 가다간 최남단 항구도시에 정박해 버릴 지도 모른다. 심란한 기분으로 해원은 창문에 이마를 콩 찧었다. 


고밀화 된 빌딩들이 레고 조각처럼 조금씩 작아지고 도시의 윤곽이 흐려졌다. 곧 드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화창한 하늘 아래 쨍한 연둣빛 벌판은 보는 것만으로도 속을 탁 트이게 해 주었다. 해원은 차창에서 이마를 뗐다. 잠잠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찰랑찰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정읍역에 도착하겠습니다. 미리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바닷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해원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좌석 사이 통로를 통통 뛰어 객실을 나섰다. 열차 적재공간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출입문 앞에 섰다. 


“나 이제 곧 내려. 나중에 연락할게.”

“응. 말벌이랑 멧돼지 조심하고, 차 조심… 특히 사람 조심하고. 무슨 일 생기면 꼭 바로 전화해!”


친구는 해원에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길 것처럼 불안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어폰을 눌러 통화를 종료하고 기차에서 내렸다. 계단을 한 발 내려딛을 때마다 허공에서 한 칸씩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캐리어를 땅바닥에 내려놓자 비로소 묵직한 무게감이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역사는 넓고 깨끗했다. 차창 밖으로 보았던 풍경과는 다르게 세련되고 깔끔한 이미지였다. 한적하고 편안한 시골 낭만이 깃들기에는 꽤 현대적인 분위기에 해원은 주춤대며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기차의 둥근 엉덩이는 플랫폼을 슬슬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역사를 벗어나자 사방에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서울이었다면 ‘경-주택 재건축 정비사업 조합 설립 인가 승인-축’ 플래카드가 나붙고도 남았을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마천루가 없어 머리 위로 하늘이 끝없이 펼쳐졌다. 창망한 푸름과 묵은 잿빛이 뒤섞인 풍경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광활한 역 앞 공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한 지방 도시계획의 전형을 지나치며 해원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훈기가 느껴지는 산들바람에 낯선 설렘이 실려 왔다. 


녹음 짙은 싱그러운 여름 풍경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걷기 시작했다. 짐가방이 돌돌 구르는 소리가 따라왔다. 발길 가는대로 걷자 곧 상점가가 나왔다. 게딱지 같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리는 빈티지 액자 속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정읍 부동산, 왕대박 부동산중개, 트리마제 공인중개사……. 당당히 이름을 내건 중개업소들이 목좋은 자리에 줄지어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간판들이 화려한 색채로 호객했지만 어쩐지 발길이 가지 않았다. 해원은 블루, 옐로우, 마젠타빛의 거리를 지나고 떡볶이와 튀김 냄새가 풍겨 나오는 시장을 지나쳐 어느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대로변에서 한 칸 들어가 있는 허름한 건물에는 ‘오름 복덕방’이라는 간판이 내달려 있었다. 처음엔 흰색이었겠지만 세월의 풍파에 회색이 되어 버린 간판에 붉은 궁서체 글씨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옛스러운 명칭이 마음에 들어 해원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필름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두껍고 오래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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