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살있게 구는 아이
그때쯤의 기억은 희미하다. 병원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흰색, 살구색, 노란색 따위의 알약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먹었다. 일찍 잠에 들고 늦게 잠에서 깼다. 약기운에 몽롱해져 다시 잠에 들고나면 아침 수업은 모조리 지각이거나 결석이었다.
"무슨 일 있니?"
교수님께 전화가 왔다. 나는 꽤나 애살있게 구는 아이이었기에 소위 '예쁨 받는 학생'이었다. 누군가는 철이 없다며 수군거리고, 누군가는 나잇값을 못한다며 수군거렸지만 자식뻘의 학생이 애교를 부리는 것을 싫어하는 교수는 없었다. 사실 애교라기에는 '익살'에 가까웠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그 '익살'말이다. 어쨌거나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 교수님이 친히 전화까지 하며 내 안부를 물었다. 나는 "지하철을 못 타겠어요. 무서워서요."라고 했고, 교수님은 올 수 있으면 오후에 학교에 들르라고 했다.
걱정됐다. 무서워. 혼이 나려나. 내가 몇 번이나 지각했고 몇 번이나 결석했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지하철에 올랐다. 결석이 6번이면 F다. 이건 바꿀 수 없는 학칙이었다. 쭈뼛거리며 교수실 앞에 섰다.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을 때 생각보다 따뜻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휴학하고 싶은데 지금은 휴학 못해요. 학교를 못 다니겠어요. 무서워요."
갑자기 눈물을 보이는 내게 교수님은 허둥거리며 휴지를 건넸다. 교수님은 나름대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나는 숨을 고르느라 하나도 듣지 못했다. 결국 오전이 아니라 오후 수업을 듣는 것을 허락해 줄 테니, 학교를 나오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덕분에 5학기를 무사히 마쳤다. 학점은 엉망이었지만 그때 그 교수님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나는 자퇴하고 고향으로 도망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몇 학기를 버텨냈다. 약을 먹으며 조금씩 나아지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약 대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시간은 흘러 4학년 무렵, 교수님이 내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현아, 사실 나는 네가 이해되지 않았어. 지하철을 못 탄다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전혀,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 그런데 반년 전인가? 내가 가족 여행을 갔는데 숨이 막히는 거야. 옷을 벗으려다가 당황해서 결국 옷을 찢어버렸지."
"그러셨군요."
"와이프랑 아들이 당황해서 날 쳐다보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아니, 민망한지도 몰랐어. 나는 너무 숨이 막혔거든. 그때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아, 걔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하고."
환갑을 바라보는 노교수의 공감은 내게 꽤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의 경험을 공유받는 것이 내겐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수현과는 이런 대화를 나눌 만큼 관계가 망가지고 있었다.
"우리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하면 좋겠어."
"왜 그런 말을 해?"
사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방금 몸을 섞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말의 내용보다는 타이밍이 나빴다. 인상을 쓰고 뺨을 때리니 수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개새끼."
"헤어질 거야?"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