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을 땐 건드리는 거 아닌데

by 녹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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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2월 9일의 산책 -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동네 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었다. 직경 6cm의 공이 식당 안으로 총알처럼 날아 들어온 건 기껏해야 밥을 서너 입 먹은 후였다. 공은 운석처럼 밥상 표면에 충돌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먹는 행위 말곤 그 어떤 것에도 관심 없었는데, 파열음을 듣자마자 음식은 뇌에서 지워져버렸다. 혼비백산하여 몸을 피하기 바빴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야구공과 비슷한 크기의 그 노란 공은 바닥을 구르다가 멈췄다. 잠시 후 나의 여섯배는 될 법한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공을 집어 들고 유유히 퇴장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는 가게 안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거인의 존재와 그의 어이없는 태도가 나를 포함한 식당 손님들에게 기괴하게 다가왔다. 심하게 비현실적인 상황이었지만 이 사건을 복기할만한 칼로리가 내겐 없었다. 정신적 충격과 심한 허기로 기운이 뚝 뚝 떨어졌다. 몇 술 뜨다 만 식탁은 헝클어진 상태여서 나는 다른 식당으로 옮겼다. 새로운 음식을 두어 숟갈 먹었을 즈음 다시, 쾅! 소리가 났다. 나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몸을 피했다. 김치와 밥, 나물이 식당 바닥으로 쏟아졌다. 내 밥상을 명중한 뒤 굴러떨어진 낯익은 노란 공은 김치 조각에 걸려 멈추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내 경험이 아니다. 오늘 후투티가 당한 일을 내 시점으로 풀어 쓴 것이다.


공원에 갔더니 오랜만에 후투티가 보였다. 여덟 마리 후투티들은 길쭉한 부리로 잔디밭을 푹푹 쑤셨다. 땅속 유충을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사 영역에 포함되지 않아 살아남은 잔디밭은 후투티의 밥그릇이다. 그와 동시에 산책객과 강아지, 또 다른 새들, 그리고 파크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의 공유지이다. 이 잔디밭은 파크 골프 전용 잔디밭이 아니라서 공이 굴러가는 영역을 한정 짓는 안전 네트가 없다. 더구나 여기서 스윙 하는 사람들은 국가대표가 아니다. 그들은 공을 완벽하게 컨트롤하지 못한다. 빗맞은 공은 잔디밭을 이용하는 다른 생명들에게로 심심찮게 날아간다.


잔디 위에서 밥을 먹던 후투티들이 후다닥 날아올랐다. 당구공만 한 파크 골프 공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기 때문이다. 잔디밭은 공사 때문에 반타작이 났다. 하지만 워낙 광활한 잔디밭이었기에 지금도 모두가 평화롭게 공유할 만큼은 넉넉하다. 후투티가 밥 먹던 곳 맞은편엔 새가 한 마리도 없었다. 왜 그 빈 공간을 놔두고 새들이 식사 중인 곳으로 공을 쳐야만 하는 것일까. 후투티들은 편안히 식사할 틈이 없었다. 두 명의 파크 골퍼 눈엔 공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코앞에 새들이 있든 말든 골프채의 헤드는 딱! 소리를 지르며 노란 공을 때렸다. 덕분에 여덟 마리의 새들은 몇 번이고 날아올라야 했다.


잔디밭 위를 물수제비뜨듯 팍팍 튀기며 굴러온 공이 산책로를 걷던 내 앞에서 거칠게 멈췄다. 이 공은 과연 종을 가리지 않는 훼방꾼이구나. 먼 곳에서 파크 골프채를 든 중년 여성이 나에게 팔을 흔들었다. 그녀는 공 좀 보내 달라며 소리쳤다. 나는 공을 주워서 강물로 힘껏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물새들만 손해일 테니 참기로 했다. 딱딱한 공을 집어 들고 잔디밭으로 저벅 저벅 들어갔다. 골퍼는 공을 받으며 "그냥 던져도 되는데"라고 말했다. 그냥 던져도 되는 건 나도 알았다. 공을 직접 갖다 준 건 그녀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앞에서 새들이 먹이 활동을 하고 있어요. 새들이 공에 맞거나 다치지 않을까요?" 그녀는 웃으며 "그런 적 없는데?"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래도 새들이 밥 먹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다 잘 먹고살아~"라고 했다. 그렇겠지. 먹고살겠지. 엄청 불편하게. 매우 불안하게.


토드 메이는 도덕의 원을 넓히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비인간 동물이 살아가야 할 삶이 있고, 그들이 좌절하거나 피해를 당하면 고통을 느낀다는 통찰"[1]을 권했다. 눈치 보며 부상의 위험을 안고 식사하는 불안감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집중해서 시원한 스윙을 날리는 즐거움이 더 우선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투티 같은 야생 동물들은 인간 삶의 들러리나 배경 화면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행성을 공유하며 함께 사는 생명체이다.


갈대밭이나 물 위에선 파크 골프를 할 수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갈대 속에서는 붉은머리오목눈이 수십 마리가 자유로이 날아다녔고 강에선 청둥오리와 물닭들이 풍덩풍덩 잠수했다. 모래톱에서는 물새들이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잠히 일광욕을 했다. 훼방꾼이 없는 새들은 명랑하며 평화로웠다. 나는 집에서 들고 온 땅콩 분태를 갈대밭에 뿌렸다. 누구라도 편안히 먹기를 기원하면서.


공원 한쪽의 공사장에선 뭔가를 절단하는 날카로운 쇳소리, 중장비의 엔진 소리, 매연 냄새, 용접 작업으로 번쩍이는 불빛 등이 산란했다. 내 앞에선 중장비가 굴러오는 참이었다. 이족二足은 사륜四輪에게 길을 양보해야 했다. 나는 공원의 언덕으로 몸을 피했고 타이어 네 개는 산책로에 먼지 구름을 만들었다. 공원의 어느 나무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후투티에게도 나에게도 공원은 자꾸만 불편한 장소가 되어간다.








1. 토드 메이,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철학』,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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