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10일의 산책-
남자아이들 다섯 명이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보리색 풍선과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동네 초등학교 졸업식의 주인공들이었다. 열 개의 손에 들린 축하의 증표들은 아이들처럼 화사했다.
무채색 옷을 입고 걷는 나에겐 축하받을 일이 없었다.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몇 시간 전에 확인했을 뿐이다. 김원영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공모전에서 떨어질 때마다 생각하고 생각한다. 나는 공모전에서 탈락한 것이지 인생이 실격당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도 나를 펼쳐 보일 공적인 무대가 있으면 좋겠다. 인정받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무대가 허락되지 않는 현실은 기운 빠진다.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약 없이 서성이느라 다리가 저리고 마음이 쪼그라들고 발이 붓는다. 이 무리는 인구가 많다. 드글드글하지만 숨죽이며 사느라 잘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 속에 나도 있다. 자잘한 시도들이 좌절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한다. 나의 존엄도 되새긴다. 어디선가 나와 같은 분투를 들이켜고 있을 동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산책을 한다.
식구들에게 점심을 차려준 뒤 산책로로 나왔다. 조용히 걷고 싶었기에 인적 드문 시간을 골랐다. 공원 공사장엔 중장비의 시동이 꺼져 있었다. 건설 노동자와 산책객도 드물었다. 헐렁한 산책로를 터덜터덜 걸었다.
내 앞에서 걷던 중년 남성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점심 식사 중인 후투티를 휴대폰으로 조용히 촬영하기 시작했다. 나도 멈춰 섰다. 그가 방해받지 않고 새를 마음껏 관찰할 수 있기를, 후투티들도 방해받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선 김에 산책로 옆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강 위에는 내게 친숙한 물닭과 흰죽지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새도 있었다. 이마는 희고 머리가 갈색이었으며 몸은 회색인데 날개 죽지에 흰 점이 있고 꼬리 쪽은 어두운 색이었다. 집에 돌아가 손목이 뻐근해지도록 검색한 끝에 정체를 알아냈다. 홍머리오리였다. '산책로'라는 공연장의 A석에서 '강'이라는 무대에 떠 있는 오리를 보면 오리가 새끼손톱보다 더 작게 보인다. 관찰하기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인터넷 창 속엔 홍머리오리의 클로즈업 사진이 널려 있다. 나는 낯선 오리의 선명한 자태들을 클릭하고 클릭했다. 하얀 이마를 가진 세련된 색감의 오리 앞에서 검지가 멈추질 않았다.
산책하다가 낯선 새를 하나 더 만났다. 참새랑 비슷한 크기였는데 앙상한 가지에 앉아 삑-삑-삑-삑- 노래하는 중이었다. 넓적한 그릇 같은 공원에 뾰족한 새의 소리가 이리저리 튕기며 진동했다. 쪼그만 몸에서 어떻게 저만한 소리가 나오는 걸까. 밝은 갈색의 배 때문에 곤줄박이와 비슷해 보였다. 가끔 꼬리를 파르르 흔들었다. 너무 예뻐서 "어머, 어머"라는 혼잣말이 자꾸 나왔다. 휴대폰으로 목청 좋은 저 가수를 한참 찍었다. 그 새는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노래했다. 가까이 가면 도망갈까 봐 멀찍이서 인상착의를 뜯어보았다. 집에 가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딱새 수컷이었다. 곤줄박이와의 차이점도 확실히 파악했다. 구분할 수 있는 새가 늘어나서 흐뭇하다.
작은 새들의 생생한 모습을 또렷하게 보는 것만큼, 나의 생생한 모습을 세상에 선명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어렵다. 나는 먼 곳에 있는 작은 새와 같다. 콩알보다 작게 보인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몸길이가 30cm나 되고 색도 화려하며 사람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후투티는 쉽게 분간된다. 하지만 작은 명금류나 점처럼 보일만큼 먼 곳에 있는 새들은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나는 홍머리오리와 딱새를 알아봤다. 내 눈의 조리개에 힘을 빡 주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려고 애썼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발견되고 싶다. 나만의 목소리와 색을 전시할 수 있는 어엿한 무대가 생기면 좋겠다.
갈대 속에서 오목눈이들이 쌩쌩 날아다녔다. 오목눈이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주 작은 갈색 솜뭉치 수십 개로 초고속 저글링을 하는 장면 같다. 생기가 압축된 그 솜뭉치들은 삐삐삐삐 지저귀었다. 까마귀는 공원 모퉁이에서 쉴 새 없이 까악 까악 거렸다. 딱새는 여전히 삑- 삑- 노래했고 물새들은 나직이 꽥꽥거렸다. 인적 드문 산책로가 새들의 노래로 가득 찼다. 탈락 전문가를 향한 응원의 노래라고, 내 귀는 멋대로 청음聽音 했다.
녹차의 일러스트 상품_ 네이버 스토어 ▼
https://smartstore.naver.com/conteenew/search?q=녹차
녹차의 일러스트 굿즈_ 마플샵 ▼
https://marpple.shop/kr/nokc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