져도 좋은 상대
산책로에 살던 애기나팔꽃과 분홍바늘꽃이 퇴장했다. 빈자리에는 코스모스와 갈대가 이사 왔다. 흙빛을 닮은 수수한 풀과 꽃들이 가을의 색을 칠하는 화가의 붓처럼 흔들렸다. 주먹 쥔 팔을 흔들며 걷다가 내 손이 코스모스를 스쳤다. 코스모스 꽃잎들이 손가락을 쫙 펴고 보자기를 내는 바람에 나는 의도치 않게 가위바위보에 지고 말았다. 괜찮다. 자연에게는 좀 더 져도 된다. 그동안 너무 이겨먹었으니까.
어정쩡한 자유
귀양살이가 일시정지된 나는 산책로로 달려 나왔다. 10개월. 하루의 거의 모든 발자국을 집 안에 찍어야 했던 다소 육체적이고도 매우 정신적인 격리의 삶을 열 달 견뎠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컴퓨터 속의 e학습터로 수업을 들었다. 불안정한 인터넷 교실엔 툭하면 뱅글뱅글 돌아가는 작고 파란 동그라미가 솟았다. 그것은 아이들과 나의 일상에 등장한 새로운 태양이었고, 이 나라와 온 세계가 걸려 넘어진 버퍼링이었다. 최근엔 코로나가 불안정하게나마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우리 정보는 거리두기를 1단계로 조정했다. 오랜만의 홀가분함이 낯설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이 자유가 압수될지 모른다. 어정쩡하게 석방된 유형수는 운동화부터 신었다. 그 신을 신고 비대면 시대의 모범 예시가 될 법한 인적 드문 광활한 공원에 도착했다. 하도 밟아서 납작해졌으나 아주 뽑혀버리진 않은 눌린 잔디가 깔린 곳. 포근한 탄력 위를 걷는 자유는 너무나 달았다.
예견된 일
팬데믹은 강도같이 우리를 덮치지 않았다.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를 찾아가겠다'라고 수차례 언질을 했었다. 2013년에 출판된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책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과학자들은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나, 3천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도 기세가 꺾일 줄 모르는 에이즈 같은 범세계적 유행병이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유행병 중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는 23년 전 이미 경고되었다. 피츠버그 대학 공중보건대학원 학장인 바이러스학자 도널드 버크는 1997년에 '어떤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관해 말했다. 그는 세 가지 바이러스를 언급했는데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를 지목하면서 인류 보건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조류독감, 사스, 에볼라, 구제역, 에이즈, 메르스, '햄버거병'으로 알려진 용혈 요독 증후군, 독감, 페스트, 광견병, 탄저병 같은 유명한 병들과 마찬가지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동물의 병원체가 인간에게 건너와 생기는 병이 이토록 많다. 인수공통감염병이 갈수록 걷잡을 수없이 커지는 이유를 위의 책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고기를 위해, 실험을 위해, 심지어 즐거움을 위해 동물을 죽인다. 이 과정에서, 또는 굶주린 동물이 먹이를 찾아 인간의 주거지로 들어오면서 접촉 기회가 날로 늘어난다. 인수공통감염병이 늘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야생동물을 포위하고, 멸종시키고, 잡아먹고, 대량생산에 목매는 고 밀집형 기업식 축산 등이 바이러스로 하여금 동물과 인간 사이의 장벽을 뛰어넘게 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거듭 밝혀진 뚜렷한 과학적 사실이다.
1992년, 세계 유력 과학자들은 '인류에 대한 세계 과학자들의 경고'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2017년에는 그 논문의 업데이트 판이 나왔는데, 184개국 1만 5천여 과학자들이 추천자로 서명하여 역사상 최다 추천 서명이 붙은 논문이다. 저자들은 특별히 심각한 문제로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온실가스 증가와 그 결과인 기후 변화의 추세, 지구의 허파인 숲 지역이 개간으로 사라져 가는 경향, 그리고 육류 생산을 위해 소 등 반추동물을 대규모로 사육하는 농업 관행'등을 꼽았다.[1]
막지 못한 코로나
그러나 우리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안 듣고 못 듣는다. 이런 경고는 연예 뉴스, 경제 뉴스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콕 집어 경고된 코로나바이러스는 2002년에 사스(SARS-CoV,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코로나바이러스), 2020년엔 코로나19(SARS-CoV-2)로 우리 곁에 등장했다. 인재人災다. 한국사와 세계사 교과서 전부에 기록될 2020년을 내가 살게 될 줄이야.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에서 쥐의 사체가 거리에 쌓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그 광경은 우리의 집들이 자리 잡고 서 있는 땅 자체가 그 속에 고여 있던 고름을 짜내고 지금까지 안으로 곪고 있던 응어리와 악혈을 표면으로 내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참을 만큼 참은 지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고름처럼 내뿜었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역 침범했다. 지구를 악착같이 침략하던 인간들을 꾸짖듯이.
여전한 세상
무려 팬데믹까지 들이닥쳤지만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바뀔 날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의 인류는 여전하다. 코로나가 일상이 된 것보다,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경제, 발전, 자본을 최고 가치로 떠받드는 세상이 더 어처구니없다. 인류는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자주 씻는 신흥 예의에 놀랍도록 신속하게 합의했지만 지구를 대하는 근본적인 예의에는 여전히 별 관심 없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일회용품에 담긴 족발과 치킨을 배달시켜 먹으며 "코로나 언제 끝나?"라는 대사를 버퍼링 걸린 온라인 수업 영상처럼 반복한다. 환경 및 건강 개선과 채식의 비례관계를 과학적으로 밝힌 기사에는 아직도 악플이 더 많다. 세계의 정부와 기업은 더 부유하게 되는 것을 향해 오늘도 기를 쓸 뿐, 친환경을 위한 파격적인 움직임엔 별 관심 없다. KF-94 마스크를 쓰자고 말하면 이성적인 교양인 대우를 받지만, '그러니 채식 지향 식단을 꾸리자'라고 하면 미개인 취급을 받는다. '고기를 덜먹고, 패스트패션을 덜 입고, 에너지를 줄이자' 같은 이야기에 자유, 권리, 경제를 핑계 삼아 '급진적인 제안'이라며 손가락질한다. 바이러스를 불러낸 스스로의 만행을 복기하는 일은 돈을 생산해내지 못하니 인기가 없나 보다.
퇴각을 바라며
거리두기가 완화되었고, 확진자가 뜸한 도시에 살고, 아이들이 정상 등교를 시작했지만 '여전한 지구 동네' 시민이기에 내 마음의 안도감은 부정적이다. 어쩔 도리 없이 적응하도록 강제된 코로나 일상은 오늘도 내일도 이어질 테니까. 마스크를 벗어던질 수 없는 것처럼, 내 능력으로는 벗어버릴 수 없는 답보의 나날이 지친다. 그래도 마침내는 역사책에 기록되고야 말 것이다. '몇 년, 몇 월, 며칠, 드디어 코로나19 팬데믹이 공식 종료되었다.'라는 교과서의 문장을, 마스크 따위는 쓰지 않은 아이들이 툴툴거리며 외우는 그날이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처럼 코로나도 멎을 것이다. 그날을 앞당기려면 이윤만 좇는 근시안적 시각을 버리고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집단적 유턴을 해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하루라도 덜 지각해야 한다. 백신 나올 날만 쳐다보고 있지만 그게 인간에게나 백신이지 지구에게도 그러할까. 탐욕에 브레이크를 걸 법적 제재, 정부와 기업 차원의 친환경 실천, 환경을 위하는 다수 시민의 움직임이 지구가 원하는 백신일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숱한 전염병 중에서 제일 빠른 시간에 사람을 죽게 만드는 병은 페스트였다. 우리가 잘 아는 에볼라도 페스트에 비할 바가 못된다. 폐렴형 페스트의 경우엔 치사율이 90%이나 된다.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의사 리유는, 그토록 무서운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을 성실성이라고 말했다. 첨단 의료 기기, 완벽한 백신, 유려한 정책 같은 걸 뒤로하고 왜 하필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에 주목했을까. 개인적인 아픔을 뒤로한 채 성실하게 환자를 돌본 리유, 누가 지워준 의무도 아닌데 보건대를 꾸려 페스트를 맞선 타루, 자신의 도시도 아니지만 그곳을 떠나지 않고 보건대에 자원한 랑베르처럼 옳다고 생각한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 사람들 틈에서 페스트는 마침내 패배했다.
코로나 일상을 사는 나에게 요구되는 성실성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이미 터진 구멍을 막는 땜질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대 흐름으로부터의 유턴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리라. 코로나19의 퇴각을 바라며 자연이 낸 보자기에 지각생의 바위를 내어 본다.
1. https://www.yna.co.kr/view/AKR20171113139800017?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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