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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 Mar 01. 2021

온 천지가 약국이고 밥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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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3일의 산책-


도시 위를 비구름이 기어갔다. 구름은 두툼하고 더러운 솜이었다. 물먹은 솜이라 무거울 텐데, 그래도 가만가만 움직였다. 역시 바람은 힘이 세다. 오전에 비가 내렸고 저녁에도 비가 예고돼 있다. 오후 3~4시엔 비가 그친다고 해서 때맞춰 산책로를 찾았다. 


촉촉한 비에 포근한 기온이 더해져서인지, 시커먼 흙에서 풀이 비죽비죽 돋아나고 있었다. 잎의 폭이 도톰했고 약간 곱슬거렸다. 초록색 바탕에 자줏빛이 돌았다. 겨우내 황톳빛의 마른 풀만 보다가 싱싱한 초록을 보니 눈이 시렸다. 집에 돌아가 컴퓨터로 검색해보니 소리쟁이라는 풀이었다. 여린 잎은 나물로 먹고 잎과 뿌리는 약초로 쓰이는 고마운 식물이라고 한다. 이 풀의 효능을 읽을 땐 마우스 휠을 여러 번 굴려야 했다. 소리쟁이는 장에도 좋고, 지혈 효과도 있고, 염증도 억제하고, 치근 통증을 없애주고, 입 냄새를 제거해 주고, 열을 내려주고, 치질을 치료해 주고, 변비를 낫게 하고, 소변을 잘 나오게 해주고, 피부 질환에는 특효이며, 탈모에도 도움을 주고, 암 치료약으로까지 쓰이고 있었다. 이런 굉장한 풀이 십만 대군처럼 언덕과 갈대밭과 산책로를 덮쳤다. 음식이자 특효약이 온 천지에 밟히도록 흔해져 버렸다.


조금 지나면 습격은 더 맹렬해질 거다. 흙이 깔린 곳 어디에서나 쑥과 냉이, 돌나물, 유채 등이 부글부글 끓어넘칠 테니까. 긴 겨울을 견디느라 굶주린 인간들에게 봄나물은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그야말로 창조주의 넉넉한 자비이다. 나에겐 A4 용지만 한 태블릿 화면에 색을 채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조물주는 천지의 색을 갈아치우시려 한다. 


한편 소리쟁이의 설명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이른 봄에 돋아서 봄을 알리는 풀". 오늘은 1월 23일이다. 이젠 1월부터 봄이 시작되는 건가.









-2021년 1월 25일의 산책-


아직 2월도 안됐는데. 이렇게 더우면 안 되는데. 걱정스러울 만큼 따뜻한 1월 말이었다.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는데도 등에 땀이 났다. 바람이 많이 부는데도 푸근했다.


산책하다가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으려고 공원에서 종종 녹음을 한다. 오늘 녹음한 파일엔 바람의 콧김 소리가 요란했다. 내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바람은, 죄가 발각된 도망자처럼 정신없이 내달렸다. 내 어깨를 퍽 퍽 치며 도주했다.


요즘 '새덕후'라는 유튜브 채널을 즐겨 본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영상은 쇠부엉이에 관한 내용이었다.* 쇠부엉이는 평지나 농경지, 하천 갈대밭에서 먹이활동을 한다. 다른 부엉이들과 마찬가지로 야행성이지만 조금 일찍 활동을 시작하는 편이다. 겨울엔 4~5시쯤, 해가 질 때부터 볼 수 있다. 영상 속 쇠부엉이는 시원하게 날았다. 빨간 노을을 온몸으로 반사하며 비행하는 자태, 공중에서 갑자기 방향을 꺾는 기술, 사람 같은 얼굴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근사했다. 그 쇠부엉이는 하천과 갈대 위를 날았다. 우리 동네 공원과 흡사한 환경이었다. 해지는 공원에서 나도 그 새를 찾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야행성 동물의 산책, 노을 때문에 봉숭아 물이 든 공원, 한밤과 새벽의 적막한 공원이 나는 궁금하다. 밤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 아침에 일어난 물새들의 기지개를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주로 환할 때 공원을 찾는다. 인적 드문 캄캄한 바깥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대학생 때 같은 캠퍼스의 학생이 퍽치기를 당했다. 그 애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학교에서 새벽까지 과제를 하다가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택시에서 내려 골목을 걷던 중 뒤통수를 맞았단다. 그 학생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와 가까운 친구의 친구이기도 했다. 다음날 뉴스에는 여대생 퍽치기 사망 소식이 떴다. 내 나이대, 20대 초반 사람의 장례식에, 나는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내 또래들, 죽은 학생의 부모님은 소리 내어 울었다.


밤길이 무서운 공간이라는 인식이 그때 처음 생겼다. 무서운 건 밤길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차차 알게 되었다. 여자인 나, 여자 친구들, 여자 선배들, 여자 후배들에게는 자취방도, 학교도, 때론 가정도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었다. 혼자 사는 자취방 창문에 계속 얼굴을 들이미는 낯선 남자, 싫다는 대도 육체적 접촉을 조르는 애인,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을 때 억지로 문을 열려던 남성, 애인과 말다툼 끝에 남자에게 맞은 일…. 우리들의 경험에는 교집합이 있었다. 그것이 반갑지 않았다. 화가 났다. 


저것은 내 주변 여성들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경찰청에서는 2010~2015년의 강력 범죄 피해자 비율을 정리했다. 거기엔 피해자의 80% 이상이 여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조사한 모든 해, 모든 지역에서 그랬다.** 한편, 오늘 뉴스 속보에선 모 정당 대표의 사퇴 소식이 들렸다. 사퇴 이유는 성추행이었다. 


리베카 솔닛은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가, 환경적 관점에서 거주 가능한 장소가 되길 원하는 동시에, 여자들에게도 온전히 거주 가능한 장소가 되길 원한다고. 

나는 공원에서 후투티를 자주 봤다. 여름 철새였던 후투티가 텃새화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전했다. 봄을 알리는 소리쟁이가 1월에 돋아나는 것도 보았다. 거의 모든 산책객들은 미세먼지와 코로나 탓에 마스크를 벗지 못한다. 이 공원은 망가지고 있는 지구의 실시간 영상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공원의 밤 풍경을 맘 편히 보러 나오지 못한다. 

나의 바람도 리베카 솔닛의 소망과 같다. 지구가 동식물들에게, 여성들에게, 그리고 남성들에게도 편안한 거주지가 되기를.


하늘에 불사조 모양을 한 구름이 두 개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모양이 틀림없는 불사조였다. 흰색 피닉스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비로 내렸다가, 바다가 되었다가, 수증기로 떠올라, 다시 새의 형체를 입을 것이다. 그렇게 영원을 살 것이다. 명 짧은 거짓된 권력과는 달리.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며 또 하늘을 봤다. 양털 구름이 떠 있었다. 작은 동그라미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었는데 건물 틈으로 보이는 모든 하늘에 몽땅 그 구름 투성이었다. 어떤 건 아기 고양이의 발자국 같았다. 우리 집 애들의 발꿈치 궤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흰색 물감으로 쿡 쿡 찍은 붓 자국 같기도 했다.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보였지만, 무엇이든 간에, 내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김기석 목사님은 『청년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자꾸 아름다움 곁으로 가야 합니다." 자연에 그어진 산책로는 내가 누리는 몇 가지 아름다움 중 하나이다. 힘겨워서, 아름다워서, 나는 산책을 한다. 









*.https://youtu.be/PJz3AV2ljGs

**. 「2016년 지역별 성 평등 수준 분석 연구 」, p307 (https://scienceon.kisti.re.kr/commons/util/originalView.do?cn=TRKO201900000615&dbt=TRK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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