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다들 엄마가 시켜서 하잖아!(3)

-좀 치는 남자. 물론, 피아노를-

by 웅숭깊은 라쌤

<혼자서도 잘 놀아요-인프피 그 남자의 은밀한 취미생활>


처음엔 다들 엄마가 시켜서 하잖아!

-좀 치는 남자. 물론, 피아노를-


(3) 어차피 취미는 즐기는 것


지금 안성시 삼정그린코아 XXX동 XXXX호에는 나와, 피아노가 살고 있다. 나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 이 피아노는 사실 진짜 피아노는 아니다. 전자 피아노를 가짜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느끼기에 녀석은 진짜라고 부르기엔 그 울림이 좀 아쉽다. 그래도 여하튼 고마운 존재이긴 하다. 층간소음 갈등을 미연에 방지해주기 때문에. 생각해보니 이건 분명 장점인 게 맞다. 한밤중에도 칠 수 있으니. 낮 시간 홀로 외로웠을 녀석을 위해 밤 10시가 되면 어김없이 녀석을 보듬어주곤 한다. 녀석도, 좋아하겠지?

또 달라진 것은 악보이다. 500원짜리 문구점 악보 대신 태블릿 PC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다. ‘악보바다’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받아놓고 그때그때 필요한 악보를 결재해서 사용한다. 아날로그 감성이 확 떨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어차피 감성은 곡 자체에 있는 법! 연주를 잘하면 된다. 요즘엔 조성모, 얀, 이기찬 대신 10CM, 장범준, Ra.D 같은 가수들이 구매목록에 들어가 있다. 가수들 이름만 봐도 어느 정도는, 감성적인 게 느껴지지 않을까?


당신이 궁금해할 것 같아 언급하자면, 이젠 이성 교제를 위한 도구로 피아노를 활용하진 않는다. 좀 더 가치 있게, ―녀석도, 좋아하겠지?― 잘 써먹고 있는 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청년 백수로 살아가던 어느 날, 조용히 발만 들이고 떠나려던 주일 미사에서 나는 주보에 실린 공지 사항을 보고야 말았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던 내가 대학 복학 후 한동안 냉담을 했었다. 냉담, 그러니까 성당에 나가지 않았단 말이다. 거의 3년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냈었는데, 백수가 되니 어디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가 보다. 그렇게 정신 차리고 향한 첫 미사에서 주보에 실린 공지 사항, 정확히는 ‘반주자 모집 공고’를 보고야 말았다. 결국 그날 이후 ‘주일 9시 미사 반주자’가 되었고, 그게 어느덧 햇수로 11년이 되었다. 이성 교제를 위한 도구 대신 반주 연습을 위한 도구로 녀석도, 그러니까 피아노도 꽤 쓸모있는 삶을 살아내는 중이다. 우린 서로 꽤, 즐겁다.


취미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혹시라도 당신의 취미가 누군가가 ―특히 어머니, 아니 엄마가― 시켜서 시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한 번 부딪혀보는 건 어떨까. 딱 즐길 수 있을 만큼의 경지에 오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취미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아니다 싶으면 도중에 때려치우고 속셈 학원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다. 취미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우리의 시야를 너무 믿진 말자. 누군가의 ―특히 어머니, 아니 엄마의― 시야는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위대하고 광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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