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항상 학생들에게 전자기기에 매몰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나조차도 스마트폰 속 작은 화면에 몸을 담그고 헤어 나오지 못할 때가 많다. 소위 ‘쇼츠’라 불리는 짧은 영상들 속엔 유익한 지식이 있고, 때론 따스한 감동을 전해주며,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며 현실 세계의 고뇌를 잊게 해주는 고마운 영상들도 적지 않다. 재미를 추구하는 영상 중에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것들도 종종 보게 되는데 4교시 종료 직전 책상 밖으로 다리를 하나씩 내밀고 달려갈 준비를 하는 학생들의 전투적인 모습을, 아마 한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종이 치자마자 미친 듯 달린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는 역시나, 급식실이었다.
흔히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선 정보, 재미, 그리고 공감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정보만 있으면 유익할 순 있으나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재미만 있다면 웃다가 결국 남는 게 없다고 느껴질 수 있고, 그래서 절대 ‘공감’이란 요소를 빼놓아선 안 된다. 상대가 독자든 청중이든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선 그들이 가진 삶의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급식은 모든 인류의 추억이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이 이야기에 아주 공감하고 있을 걸 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냐고? 종이 치자마자 달려가기 위해 한쪽 다리를 빼놓고 준비 자세를 취하던 경험은 없을지라도, 4교시가 얼른 끝나 점심시간이 시작되길 간절히 바라던 경험은 분명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하나의 ‘추억’이지 않은가!
이런 건 어떠한가. 한 달 혹은 일주일 치 식단이 공개되었을 때 형광펜을 들고 좋아하는 메뉴에 색을 칠했던 경험.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지금의 아이들도 어김없이 고기 혹은 튀김 반찬, 스파게티 같은 양식 메뉴에 정성껏 색을 칠한다. 반대로 가지나물이나 미역줄기볶음, 코다리찜은 아주 새까맣게 지워버리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실제 메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지금의 어른들이 수십 년 전 그러하였듯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또 한 가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장면이 있다면, 그건 바로 ‘밥 친구’이다. 희한하게도 떡볶이의 떡과 어묵처럼 점심시간마다 밥을 함께 먹는 단짝 멤버는 항상 고정되어 있다. 심지어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급이 바뀌어도 끝까지 밥 친구를 고수하는 아이들도 있다. 굳이? 굳이! 그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그렇다고 특별한 이슈가 오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와도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아니 아예 대화가 없을 때도 많다. 그런데 왜 굳이? 굳이! 아마 이런 게 아닐까? 그저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심리적 안정감을 얻게 되는, 그런. 사실 난 알고 있다. 그들에겐 식사 후에 함께 아이스크림을 빨며 운동장 트랙을 도는 낭만이 있다는걸, 미친 듯이 땀을 흘리며 함께 뛰어노는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걸.
정말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급식에 관한 10대들의 삶의 단면은 어른들의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 어른들도 ‘편식’이란 걸 한다. 정확하게는 편식이라기보단 자기 맞춤형 ‘선택식’이라고나 할까? 학교에는 보통 ‘교직원 식당’이 따로 운영되는데 그곳에서 마주하는 교사들은 급식을 마주하는 자세에 관하여, 자기 개성을 맘껏 발휘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밥을 담는 칸에 고기반찬을 가득 채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샐러드를 산더미처럼 쌓는 이도 있다. 아, 오해가 생길까 봐 미리 말하지만 이건 결코 그들을 향한 비하의 발언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개성에 대한 소개일 뿐. 실은 나도 언제부턴가 탄수화물은 소화가 잘 안되어서 밥은 남들의 반 밖에 푸질 않는다. 남들과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역시나 ‘자기 맞춤형’이 탁월한 표현이다. 어쨌거나 나와 다른,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며 처음엔 ―지금도 조금은― 의아하기도, 이상하기도 했으나 이 모든 건 각자의 개성, 그들 나름의 삶이자 선택이다. 존중이 필요한 부분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사들은 새로운 수업 시간표를 배부받는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4교시 수업의 존재 여부. 선생님들은 4교시 수업이 없으면 조금 일찍 점심을 먹을 수 있고, 그래서 기분이 좋다. 학생들이 다리를 빼고 종 치기를 기다리는 심리와도 비슷한 것이다. 맛있는 반찬이 나오는 날 조금 늦게 급식실에 가면 ―그곳이 교직원 식당임에도― 여분이 없어 눈물 젖은 밥을 먹어야 할 때도 있으므로, 이건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통마늘제육볶음’에서 ‘통마늘볶음’으로 변신한 메뉴를 접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나를 이해할 수 없을지어다!
시간표를 꼼꼼히 살피는 또 다른 이유로는 역시나 ‘밥 친구’가 있다. 내 시간표뿐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이들의 시간표도 살펴야 한다. 4교시 수업이 없어도 밥 친구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꼭 함께 식사하는 분들도 많다. 밥 친구들은 식사를 마치고 함께 산책하거나 수다를 떠는 일상을 보내기 마련이고 그것까지가, 점심시간이니까. 시간표가 맞지 않으면 그때그때 다른 누군가와 식사하면 그만이지만 나 역시도 기왕이면 H, W와 함께 가서 먹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냥, 그게 편하다. 늘 그렇게 지내다 보니 그게 몸에 배어버렸다. 그리고 남들처럼 식사 후엔 으슥한 곳으로 가 그들과 수다를 떤다. 급식실 안에선 하지 못했던 대화 주제들이 양껏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것까지가, 점심시간이다. 학생 상담이나 업무적인 이유로 그 수다를 떨지 못하면 이상하게 그날은 심각한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식사 후 디저트를 빼먹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물을 마시지 못한 듯한 느낌. 수다는, 점심시간의 필수 코스다.
다시 말하지만 급식에 관한 10대들의 삶의 단면은 어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1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성인으로서의 삶으로 고스란히 이어질 수 있고, 1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미래도 달라질 수 있단 것이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부모에게 마냥 의존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 반대로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하며 실패를 반복해서 경험했던 이들은 세계를 선도하는 개척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아마, 두려움이 사라졌을 테니까. 개인의 이익을 좇으며 온갖 불평불만으로 10대를 살았던 이들 곁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희생과 배려를 일찌감치 배운 이들 주위엔 늘 사람이 따르지 않을까? 이건 굳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급식을 먹고 자란 인류에겐, 지극히도 평범한 이야기니까.
일류가 되기 위하여, 아이들의 급식실이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내일이란 이름의 식단표에서 각자가 가진 개성이란 메뉴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길, 더불어 그 개성이 기왕이면 세계에 기여하는 올바르고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길 아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