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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매생이굴국 맛을 알아?

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by 웅숭깊은 라쌤

니들이 매생이굴국 맛을 알아?

: 더 많이 사랑하려고


그러니까 그게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살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급식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우선 임용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대학 시절 몸을 의탁했던 ‘학사’라는 곳에 더는 머물 수 있는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고 짐을 싸서 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이사했다. 이사라기엔 원래 살던 집으로의 복귀였으나, 금의환향을 하지 못한 자식의 씁쓸함은 매일 차려지는 어머니 밥상마저 쓴맛으로 채워버렸다.

탈출구가 필요했던 청년 백수는 주말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 ―마치 대학생인 듯― 모교 대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 고시생에겐 체력이 필수라는 아주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으므로 어머니는 밥상을 차리는 대신, 용돈을 쥐여주셨다. 서너 시간 땀을 흘린 뒤 우린 언제나 단골 양꼬치 집으로 향했고 은은히 퍼지는 향신료 냄새는 무척이나 달큰하고, 포근했다. 비록 술값으로 내는 꼬깃꼬깃한 지폐는 어머니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수개월을 쳇바퀴 돌아가듯 살았으나 임용시험이 두어 달 남은 시점부터 나와 동기들은 달큰함 대신 시큰함을, 포근함 대신 가시밭을 걷는 듯한 아릿함을 느꼈다. 이듬해에도 같은 삶을 살 순 없었으니까. 올림픽을 앞두고 마지막 피치를 끌어올리는 대표팀 선수들처럼 우리도 역시 학업에 매진하기로, 대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즐김의 시간을 갖기로, 그렇게 약속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던 대운동장에서 나의 왼쪽 발목은 그야말로 ‘아작’이 났다. 우두둑, 댕강, 깍뚜기를 어금니로 힘껏 씹을 때의 소리가 나의 귀에도 선명히 전해졌고 ―마치 대학생인 듯― 모교 대학 병원으로 실려 가야만 했다. 그래서, 임용시험은? 목발을 짚고 시험장에 갔으나 한 시간 이상 앉아 있으면 부어오르는 발목의 통증은 시험장의 냄새를 비릿함으로 채워놓았고 나의 지난 일 년은, 젓갈이 그러하듯 그저 숙성되는 시간으로 남겨져 버렸다.


그러니까 그게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살다가 발목이 부러져 입원했던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유독 건강식을 선호하게 된 것이. 우여곡절 끝에 급식의 혜택을 받는 교사의 타이틀을 얻고 난 뒤 나의 행복을 더욱더 끌어올려 준 위대한 순간은 다름 아닌 급식을 처음 마주했던 때였다. 건강한 반찬이 매일, 끼니마다 다르게 밥상 위에 차려진다니! 제철을 맞이한 나물이 오물조물 참기름에 버무려져 다소곳이 스테인리스 용기에 가득 채워진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살짝 데쳐진 브로콜리가 빨간 초장과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매생이굴국만 한 것은 또 없다. 밖에서 사서 먹으려면 적어도 만 원은 내야 하고, 이게 재료 관리가 쉽지 않아 아무 가게에서나 먹을 수도 없는 아주 귀하디귀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매생이굴국이 급식으로? 자, 이제부터 표정 관리가 중요하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듯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국자를 든다. 국자를 깊숙이 넣은 다음 바닥을 긁어 쓱 올리면 국자에 굴이 한가득 담기는데, 너무 음식 욕심내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으므로 건더기는 살짝만 덜어내고 국물과 함께 식판에 담으면 그곳은 한국의 나폴리, 통영이 된다! 시원한 바다향이 비강을 지나 편도체와 해마 등 뇌의 수많은 기관에 전달되며 모든 잡념과 분노를 깡그리 제거한다. 바닷물에 모래가 씻겨가듯, 그렇게.


물론 아이들은 ―그리고 일부 어른들도― 매생이굴국을 좋아하지 않는, 아니 극히 혐오한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음식들이 가진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우선 비린 맛. 이걸 ‘바다향’으로 치환할 수 없다면, 지구에 먹을 음식이 매생이굴국밖에 남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이를 거부할지 모른다. 또 하나는 물컹거리는 식감. 매생이도, 굴도, 씹었을 때 치아 끝에 전해지는 감촉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고들 한다. 후루룩 면을 흡입하듯 매생이를 입안 가득 채워 넣는 묘미 혹은 굴을 씹었을 때 마치 시폰 케이크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가는 쾌감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면, 그들은 매생이굴국 대신 사약을 마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 사약은 좀 과했나. 사약 대신 한약으로…….


어쨌거나 알고 보면 나도 그러하였으니, 나 역시 매생이와 굴로 만들어진 음식을 격하게 거부하는 평범한 인류였던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게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살다가 발목이 부러져 입원했던 그때부터 유독 건강식을 선호하게 되며 달라졌을 뿐이다. 이것을 굳이 성장이라 부르고 싶진 않다. 그저 ‘변화’라고 하는 편이 맞겠지. 다만 이러한 변화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건강식을 즐기게 되었다고 하여 치킨이나 피자, 육류 위주의 식단을 완벽히 차단한 건 아니다. ‘이것만’ 좋아하다가 ‘저것도’ 좋아하게 된 셈이랄까? 이 어찌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가 머무는 이 세계엔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사방 천지에 널려 있다. 점심시간 급식실에 당도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낯선 반찬을 마주한다면, 그리고 이를 젓가락으로 살며시 집어 입안에 머금었을 때 느껴지는 최초의 황홀함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는 또 새로운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겠지. 그리하여 급식은 신이 내려준 축복임이 분명하다. 매일 신의 축복 속에 살아가는 나. 이 정도면 나도 일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0070.JPG 글과 이미지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하여간에 제가 먹는 급식이긴 합니다


반대로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른 인류와의 갈등은 불가피하고, 쉽사리 해결되지 않으며, 그래서인지 자꾸만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고 그로 인해 나의 하루가 괴로워진다. 살아가면 갈수록 미운 대상이 계속해서 쌓이고 또 쌓인다. 아마도 신의 저주와도 같은 것이겠지. 그렇다고 직장을 때려치울 수도 없고, 모든 관계를 끊고 사는 자연인이 될 자신도 없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저주라면, 적어도 인류 외의 것들에겐 충분한 사랑을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매생이도, 굴도, 매생이굴국도 내게 있어 마주하는 순간 기쁨이 솟아나는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나는 적어도 매생이와, 굴과, 매생이굴국을 거부하는 인류보단 아주 조금 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2. 매생이 굴국.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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