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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와 감자

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by 웅숭깊은 라쌤

랍스터와 감자

: 얻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니



방학이 되면 곳곳에서 방학 특수를 노린 온갖 시도가 펼쳐진다. 놀이공원에선 학생들을 위한 특별 할인 행사를 하고, 영화관에서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주로 상영한다. 아마 나름의 성과가 있으니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오죽했으면 TV에서도 학생들을 겨냥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편성되는데, ‘나도 방학인데 교사를 위한 혜택은 어디에도 없나’하는 씁쓸함을 머금었다가 영화 전문 채널에서 ‘히어로 무비’를 연속 방영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금세 싹 풀렸다. 유치하다고요? 제 나이가 한창 히어로 좋아할 나이거든요!

TV에선 <원더 우먼 1984>라는 영화가 방영 중이었는데, 주인공 ‘다이애나’가 수십 년 전 세상을 떠난 연인 ‘스티브 트레버’를 그리워하던 와중 갑자기 그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며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소원을 들어주는 돌멩이가 있는데, 다이애나가 트레버가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자 돌멩이가 정말로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다. 앗, 이렇게만 얘기하면 정말 유치해 보일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작품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전개되긴 한다. 아, 참!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그 돌멩이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만한 ‘대가’를 가져간다는 지점이다. 마치 밤 열 시의 야식이 출렁이는 뱃살을 부여하듯, 그렇게. 세상을 구해야 하는 히어로, 다이애나는 죽은 연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 대가로 히어로로서의 강력한 힘은 잃고 만다. 사랑이냐, 세상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녀는 고뇌하고, 울부짖는다.


히어로 영화를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여, 삶의 진리를 전해주는 이 위대한 스토리를 어찌 감히 비하한단 말인가! 영화적 상상력은 살짝 거들었을 뿐, 결국 우리네 삶을 옮겨놓았을 뿐이다. 우린 늘 경험하고, 깨닫는다. 얻으면 잃는 것이 있기 마련이란 걸. ‘슈퍼 파워’는 없지만, 나 역시도 영화 속 히어로처럼 일득일실 一得一失의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다. 그 대표적인 시기는 11월, 이름하여 수능 특식 주간!

매년 11월엔 수능이라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진행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인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설적인 시험이 아닐까 생각되는 이상한 시험이다. 고등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 시스템을 들여다보면 ―겉으로는― 굉장히 ‘친 학생’적이라 할 수 있다. 학생의 권익을 보호하고 최대한 학생들의 능력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이 설계되어 있다. 최근엔 ‘고교학점제’라는 걸 시행했는데,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고 평가 방식을 개선하여 성적 부담을 줄이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다. 사실 이러한 고교학점제뿐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해서 학생들을 위한답시고 수시로 교육과정은 바뀌어왔다. 그래서, 역설적이란 말이다. 대학 서열화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왜 자꾸 고등학교 교육만 뜯어고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고교학점제를 제대로 정착시키려면 대학 서열화부터 없애든가, 대학을 그냥 둘 거라면 합리적 경쟁이 이뤄지도록 고등학교 교육 시스템도 거기에 맞춰 운영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괜히 사교육계에 좋은 일만 왜 자꾸 벌이는 것인지 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그저 역설적이라고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전문가분들이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가고 있을 거로 믿는다. 참, 하여간에 수능이 다가오면 학교에선 꼭 ‘수능 특식 주간’이란 걸 운영했다.


아마 10년 전쯤일 것이다. 수능 즈음하여 학교 영양사 선생님이 3학년 각 학급에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학급별로 원하는 특식 메뉴를 선정하라는 것! 시험 스트레스에 지친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소소한 이벤트가 되었다. 수능이고 나발이고 학급마다 격한 토론의 장이 열리게 된다!

녀석들은 의외로 세상 물정을 아주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비싸기만 한 메뉴를 고르면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세계 3대 진미, 뭐 그런 건 애초에 생각해선 안 된다는 거다. 그렇다고 흔하디흔한 삼겹살 같은 고기 메뉴도 영 성에 차지 않으니, 아이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상당히 오랜 고민 끝에 확정된 수능 특식 메뉴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정통 인도 커리와 탄두리 치킨’, ‘즉석에서 만든 오븐 피자’, ‘치즈를 얹은 랍스터 구이’ 등등. 그럴싸했다. 실제로 커리와 치킨은 인도 그 자체였고,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외부에서 푸드 트럭이 학교로 들어와 정말 즉석에서 오븐 피자도 만들어줬다. 이게 바로 특식의 묘미! 랍스터의 경우 단가가 높아 다리 한 쪽씩밖에 못 먹을 거란 부정적 견해가 강했으나 위대하신 영양사 선생님께선 이를 해내셨다.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이다.


3.JPG 글과 이미지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하여간에 제가 먹는 급식이긴 합니다


아뿔싸! ―아마 예상했겠지만― 수능이 끝난 후 한동안은 주로 채식 위주의 식단이 차려졌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군대에서 극기 주를 보내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들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특식 주간 내내 웃음이 가득했던 급식실 안엔 ―언제 그랬냐는 듯― 온갖 불평불만이 쏟아졌고, 아마도 그 주에 선생님들 사이에선 회식이 잦았던 것 같다. 메뉴는 족발이었던가?

지금은 이러한 수능 특식 주간은 사라졌다. 무상 급식이 보편화되었고, 식재료 발주와 관련하여 이러한 주간을 운영하기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영양사 선생님은 종종 나름의 이벤트를 통해 교직원 및 학생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전해주신다. 특식 주간이 아니어도 언제나, 급식은 특별하다.


삶은 우리에게 늘 득 得과 실 失을 가르치며, 이익이 발생한다면 그만한 대가도 따를 수 있음을 알라고 한다. 무조건 이익을 포기하고 평범한 인류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테고, 특별한 일류가 되어도 괜찮을 거다. 다만 그때 조금은 포기할 줄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함을 기억했으면 한다. 얻으려고만 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일 년 내내 억지로 특식 주간을 운영하면 ‘전쟁 기간 체험’이란 명목으로 삶은 감자만 먹는 날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고단한 나날 속에 머무르고 있다면 반드시 찾아올 영광의 순간을 떠올리며 버텨내자. 수능이 끝나면 찬란한 대학 생활이 기다리고 있듯, 오늘의 감자가 내일의 랍스터를 이끌지니!

그나저나 재미는 있겠다. 랍스터도, 감자도, 특식도, 채식도 모두 있는 다채로운 삶이 말이다.


3. 랍스터와 감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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