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에 충성하는 자, "給食, 忠"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 혹은 역사 시간에 배웠던 것 같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표현을 전해 들으며 나의 머릿속에선 인간관계 정립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이뤄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며 친한 친구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건 역효과를 낳았고 그리하여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그 시절 그 순간의 고찰에서 한 가지 놓쳤던 점은 동맹이 우호적 관계가 아니라 그저 일시적인 전략적 연합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영원한 적이란 없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 모호한 인간 세계의 단면이 아니던가. 결국 연합은 와해되고 이로 인해 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결국 ‘혼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역시도 삶의 소중한 경험이 되어 진정한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이뤄졌고, 급식을 먹으며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소중한 관계는 ‘관심사와 공유되는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꼭 연인이나 부부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관계 형성 및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같은 취미 혹은 관심사에 대한 나눔이다.
띠동갑만 넘어가도 세대 차이가 심각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신입생들이 죄다 자식뻘이다. 이들이 살아온 삶 속에 공유할만한 공통의 문화적 요소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다행히 남학생들은 비교적 쉬운 편이긴 하다. 유럽 축구, 특히 프리미어리그는 남자들에겐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 키워드라서 첼시, 리버풀, 맨시티 등을 언급하면 다들 아주 쉽게 흥분하곤 한다. 서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최고라며 우기는데 얘들아, 아직까진 그래도 ‘맨유’란다. 알겠니?
여학생들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한때 우리 반 여학생들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매주 금요일 퇴근 후 ‘뮤직뱅크’라는 프로그램을 찾아보던 때도 있었지만, 아이돌의 세계는 너무도 광범위하여 한 해가 다르게 새로 쏟아져나오는 그들의 정체를 모두 기억하기엔 뇌의 용량이 너무 딸린다. 그래도 ‘BTS’나 ‘스트레이키즈’는 알고 있답니다!
십 대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나의 학창 시절엔 일본 문화를 즐겨 찾는 이들을 ‘오타쿠’라 비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이젠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무분별한 선입견이 사라지고 문화에 대한 존중이 형성된 덕분일 것이다. 아마도 <귀멸의 칼날> 시리즈의 공이 크지 않았을까? ‘귀칼’ 시리즈는 심지어 북미 시장을 강타하여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젠 전 인류에게 무한한 감동을 선사하는 중이다. 물론, 나에게도. 기다려라, 키부츠지 무잔! *히노카미 카구라!
*<귀멸의 칼날> 시리즈에서 무사들이 사용하는 기술은 ‘~의 호흡’이란 형태를 띠고 있고 ‘히노카미 카구라’는 ‘해의 호흡’이라 번역된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학생들과의 공감대 형성에 한계는 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 안에서 계속하여 충돌하는 언어적․문화적 벽이 확인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역시나, 함께 웃고 떠드는 건 같은 성별이자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제격이다.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호흡이 맞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우리의 대화엔 요즘 아이돌 대신 ‘핑클’과 ‘S.E.S’가 있고 요즘 축구 선수 대신 전설의 레전드 ‘카카’나 ‘호나우지뉴’가 언급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추가적인 학습 없이도 술술 통하는 재미. 이런 호흡은 연륜의 호흡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호흡의 호흡?
그런데, 연륜의 호흡 혹은 호흡의 호흡만큼 위대하고 찬란한, 숨겨진 호흡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채소의 호흡’. 그리고 그 호흡이 발현된 장소는 역시나 급식실! 채소의 호흡에는 성별, 나이 같은 외부 조건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이지의 오도독 씹히는 식감, 케일의 씁쓸함이 주는 매력, 가지를 씹었을 때 퍼지는 진한 채즙의 풍미, 당근의 베타카로틴과 양배추의 식이섬유를 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상대와 이런저런 채소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급식실은 순식간에 도시 외곽 지역에 지어진, 조경이 아주 잘 된, 멀리 작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북유럽풍 원목 테이블이 설치된, 농가 주택의 잔디가 드넓게 깔린 마당처럼 변했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은퇴한 뒤의 삶을 설계했을 때 떠올렸던 장면 그대로였다. 참, 아름다웠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호흡은 나눌 수 있는 이가 극히 한정적이어서인지 무척이나 소중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어차피 모든 인류와 호흡을 맞춘다는 건 불가능하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같은 호흡을 나눌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건 쌍둥이도 안 될걸? 게다가 모든 호흡이 거창하고 창대할 필요도 없다. 그저 소소한 이야기도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작지만 지속적인 호흡이 가능한, 어쩌면 이런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더욱 필요한 상대일지 모른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최고급 캐비어와 송로버섯을 논하지는 못하지만, 유명 호텔 뷔페의 까라비네로 새우를 다루지는 못하지만, 채소의 호흡만큼은 능히 나눌 수 있는 그런 존재이려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꼭 있어야만 하는, 채소와도 같은, 그런.
앗! 물론 가끔, 아니 아주 자주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호흡도 나눌 것이다. 채소를 좋아하지만, 채식주의자는 아닙니다. 고기 무지하게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