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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Oct 24. 2024

8월의 행복한 장례식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식탁에 앉아있던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 표정에는 뭔가 슬퍼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대한 고민도 서려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려서 많이 돌봐주신 분이지만 못 뵌 지 십 년 넘게 지나 기억에 희미해졌을 할아버지였다. 나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민자들 대부분의 마음의 짐은 역시 부모님이다. 가까이 모시지도, 임종도 못 하는 불효. 불과 넉 달 전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힘든 고비를 넘기셨던 아버지가 결국 기력이 다하셨는지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소용일까 싶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계시니 가보기로 했다. 겨우 발인 직전에 도착했다. 여름 성수기를 간신히 지나 비행기표를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처음 입어보는 상복은 터무니없이 컸다. 입관을 못 했어도 전에 다녀가면서 침상에 앉아계시는 옆모습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눈에 담아 갔으니 마지막 인사는 되었다... 고 생각했는데 막상 화장터에 도착해서 관이 내리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달려갔다. 아빠를 부르는 나를 흰 장갑을 낀 직원들이 붙들었다. 관 한 번 안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보냈다.


    자식 셋을 8월에 낳은 아버지는 8월에 돌아가셨다. 거동이 불편해서 못 오시는 집안 어르신들을 제외하면, 그리고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사실만 빼면 평화롭고 순조로운 장례였다. 아버지가 재가 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밥을 먹었다. 사촌언니들도 어울려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그제야 장례식도 결국은 하나의 잔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억에 웃고, 추억에 우는 마지막 의식. 아버지가 보셨다면 뒷짐 지고 돌아보셨을만한 예쁜 동산이었다. 


    언젠가 미국에 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옆자리에는 미국에서 내니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이 타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는데, 정작 본인은 태연하게 기내식을 빵에 잼까지 발라가며 비웠다. 그 모습을 이십여 년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슬퍼도 사람이 24시간 울 수는 없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널 언제 또 보겠니"


    몇 년 만에 만난 외삼촌은 옆자리에 앉게 된 버스에서 지갑을 열어 갖고 있는 현금을 털어 내주셨다. 마흔이 훌쩍 넘은 조카가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초상을 치르고 난 뒤에도 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부모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듯, 우리는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하러 갔다. 주민센터에서 서류를 작성하며 생각해 보니 그날은 같이 간 오빠의 생일이었다. 그것도 60번째의. 그렇게 서류처리를 하고 나자 이번엔 유품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아버지의 서재엔 남들은 관심 없을 책이 가득했다. 비싼 원서를 사들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늘 불만이 많았다. 


    "아니, 아버진 딸내미 용돈이나 주시지 뭘 이렇게 책을 많이 사셨어요?"


    정리하다 지쳐 투정 부리던 나는 그 순간 책 안에서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만 원짜리가 30장 들어있었다.

    그만 웃음이 터졌다.


    "고마워요, 아빠. 잘 쓸게요."


    아버지의 수수한 옷장 안에서 눈에 익은 손수건 하나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내가 우리 아버지 딸이어서 행복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내 아빠여서 행복하셨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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