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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지혜 Sep 30. 2024

대학 신입생으로 돌아가던 날

퀘벡 주립대학 UQAM

    등록금을 내고, 학생증을 발급받고, 신입생 맞이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테이블들을 지나  주디트자스맹관을 나섰다. 앞의 도로는 언제부터인지 차 없는 거리가 되어 있었다. 학교 방송국 DJ박스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건너편 잔디밭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아 배낭에서 오렌지를 하나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한 젊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짧은 턱수염에 짙은 선글라스, 네이비블루 블레이저를 입고 성큼성큼 걷는 그의 손에 커다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붉고 푸른 꽃들이 베이지색 코팅지에 쌓여 가을 분위기를 내고 있는데도 나는 확신했다.


'여자에게 줄 꽃다발이다'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걷다가 꽃을 들어 보는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UQAM 대학의 상징과도 같은 생 자크 교회 종탑 앞을 지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나는 이에 7년 만에 돌아왔다. UQAM(L'Université de Québec à Montréal), 퀘벡 주립대학 중 몬트리올에 위치한 이 학교에서 나는 프랑스어 1년 과정을 수료했었고, 이어서 두어 과목 동양 문화에 관한 수업을 수강한 적은 있지만 전공생들과 같이 신입생 대열에 합류한 것은 처음이다. 학기당 15학점씩 채워 들어도 일 년이면 끝내는 단기과정 중에  파트타임으로 두 과목만 신청해 놓았을뿐이지만, 학부생들과 같이 수업을 듣게 돼있어서 몇 달 전부터 부담감이 쌓이는 중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은 봄꽃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언제나 이 학교가 좋았다. 전망 좋은 자리를 찾아 랩탑 컴퓨터를 여는 것만으로 평온해지곤 했다.

학교 건물들 사이의 정원
복도를 걷다 발견한 벽화

UQAM을 선택한 이유

    1959년, 퀘벡의 불어사용자는 4%만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영어사용자 11% 대학진학률의 반도 못 미치는 숫자였다. 몬트리올에는 불어로 가르치는 대학은 몬트리올 대학뿐이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퀘벡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켜 1969년*에 새 학교를 열었다는데 그게 바로 UQAM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 부머들이 대학에 갈 나이가 되는 시점이었던 데다 퀘벡에는 '조용한 혁명(Révolution Tranquille)'**이 한창이었다. 기존에 있던 몇몇 학교들 (Ecole des beaux arts와 Collège Sainte-Marie 등)이 새 학교에 통합되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학교인 만큼 가장 큰 장점은 개방성이다. 직업경력을 인정해서 입학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직장인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꽤 많은 저녁 클래스가 개설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대학 순위로 보면 인구 대비 대학생 수가 많기로 유명한 몬트리올의 4개 종합대학 중에 단연 꼴찌다. 캐나다 1위인 매길(McGill)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프랑스어 대학인 몬트리올 대학에도 밀린다. 그래도 6만여 명이 공부하고 있는 이 학교의 자부심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민자인 내게도 어렵지 않게 문을 열어줘서 청강생이 아닌 정식학생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1800년대에 세워진 매길 대학교나 몬트리올 대학교와는 다르게 1970년대에 지어 UQAM과 콩코디아 대학은 교문이 없다. 몬트리올 시내에 건물이나 부지를 사서 학교 규모가 커질 때마다 하나하나 늘려가는 것이 이 두 학교가 커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UQAM의 위치로 말하자면, 지하철 노선이 4개인 몬트리올에서 유일하게 3개 노선이 교차하는 곳이고 시외버스 터미널이 근처에 있다. 베리위캄(Berri-UQAM) 역에서 열차를 내리면 개찰구를 나서자마자 UQAM 대학 본관, 즉 주디트자스맹 (Judith Jasmin) 관에 지하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퀘벡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큰 성공을 거둔 언론인의 이름을 받은 이곳은 1979년에 생 자크 (St. Jacques) 교회를 매입해서 종탑과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건물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58년에 처음 지어진 생 자크 교회는 1933년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재건축된 것인데, UQAM대학 건물로 남은 부분은 뒤에 퀘벡 정부로부터 역사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내부에서 본 주디트 자스맹 관의 중심

    UQAM의 캠퍼스는 이곳만이 아니다. 몬트리올 섬 바깥의 라발이나 롱궤이 등에도 제한적이지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몬트리올 시내에도 베리위캄에서 지하철 두 정거 거리인 플라스데자르 (Place des arts) 역과 연결되는 프레지던트케네디관을 중심으로 작은 학교단지가 형성돼 있는데, 캐나다에서 처음 환경분야의 박사학위 과정을 개설한 학교답게, 퀘벡의 생태학자 피에르 당스로 (Pierre Dansereau)의 이름을 붙였다.

UQAM 의 또다른 상징이 된 프레지던트케네디관

    거대한 선박 형태의 프레지던트케네디관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기보다 주소의 길 이름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베리위캄역 부근에 큰 건물을 지을 부지를 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시내중심에 더 가까운 캠퍼스를 필요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1998년에 이곳이 문을 열면서 더 많은 강의실이 확보되었다. 국제 재즈 페스티벌 등 큰 행사가 열리곤 하는 광장 쪽으로 길을 건너 핑크맨, 무슈 로즈를 하나 발견했다.

    2024년 9월 29일, 바로 오늘까지 전시 중인 이 작품은 프랑스의 필립 카트린 (Philippe Katerine)의 미뇨니즘 (Mignonisme) 전의 일부로, 몬트리올과 퀘벡시티 곳곳에 크고 작은 무슈 로즈가 설치되었다. (불어로 색깔로서의 '로즈'는 장미가 아닌 핑크색을 의미한다) 우리에겐 '반나체 블루맨'으로 알려져 버린 파리 올림픽 개막식의 그분이다. 미뇽(mignon)이 잘생겼다, 귀엽다는 뜻이니까 미뇨니즘이란 단어는 말하자면 '귀요미즘' 쯤으로 만들 수 있겠다.

그분

   UQAM대학의 별난 점은 또 있다. 상당히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학기가 시작되면 첫 수업에서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진행할 건지, 평가는 어떻게 하고 성적을 줄 건지 설명한 후, 학생들의 이의가 없다면 그중 두 명에게 학습 플랜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받는다.


'Initiation au travail historique'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이 가장 먼저 수강해야 하는 이 과목의 첫 수업에 30분 일찍 들어갔다. 저녁 시간대여서인지 이미 제법 많은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교단엔 눈처럼 하얀 수염의 남성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맨 앞자리지만 가장 먼 구석에 앉았다. 그렇게 십 분쯤 지났을까. 호리호리한 곱슬머리의 남자가 들어섰다. 미리 와있는 학생들과 일일이 눈인사를 나눴다. 그가 교수였다. 미리 와있던 이는 새로 설치한 프로젝터를 점검하러 온 시청각실 직원이었던 걸 그제야 눈치챘다.

    장-프랑수아, 얼마나 프랑스적인 이름인지. 심지어 프랑수아는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이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프랑스인의 후예끼리 결혼해서 태어난 것 같은 전형적인 프랑스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우리가 첫 학생이라고 했다. 원래 퀘벡 국립 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래 일하다가 몇 년 전에 'Pourquoi pas? (Why not?)'라며 역사학 박사학위를 땄고, 드디어 UQAM에서 가르치기로 했다는 것. 첫날부터 우리는, 의욕이 넘치는 늦깎이 신입교수님의 신입생 삼십여 명은, 각기 다른 배경의 자기소개를 마치고 방대한 도서관 자료를 효과적으로 뒤지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참!

꽃다발을 갖고 갔던 그 남자는 10분쯤 후에 되돌아왔다. 꽃은 다른 사람 손에 넘겨져 있었다. 긴 갈색머리의 그녀도 표정이 밝았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의 팔이 닿을 듯 말 듯했다. 내 맘대로 무심코, 두 사람 사이 유모차까지의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첫 번째 과제를 제출하고 겨우 숨 돌린 지금에 돌아보는 그날은, 모든 것이 예뻤다.

UQAM 대학 건물

* 위키피디아에는 1968년 4월 9일로 나와있지만, UQAM 대학 홈페이지에는 1968년 12월에 관련 법안 채택, 1969년 4월 9일에 학교 설립으로 표시되어 있다.

** 폭력사태가 수반되지 않고 퀘벡 사회전체가 전근대적인 가톨릭 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을 거쳐 이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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