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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Apr 28. 2020

곁에 있었지만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

동네 산책이 우리 가족에게 미친 영향

 바닥을 찍은 기분이다. 엄마로서 실패한 느낌이다. 어제 그랬다. 새벽에 제대로 잠을 못 잤던 나는 하루 종일 피곤했고 그래서 첫째 아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 유달리 신경질을 많이 부렸고, 첫째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다. 주말에 남편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면서 우리 가족 모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호주에 외출 자제령이 내려졌지만, 그래도 운동은 허락하니까 산책을 하러 나간 거다.

전에 가 본 적이 없는 공원에 갔다. 작지만 호수가 있는 산책로였다. 첫째 아들은 아빠와 스쿠터를 타고 씽씽 앞으로 가고 난 유모차를 끌며 그 뒤를 걸어갔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그 작은 산책로를 걷다 보니 꽤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숲이 이어지고 또 다른 공원이 나온다. 이런 길이 있는 줄도 모르고 거의 일 년을 이 동네에 살았다.


그 날에 처음 발견한 산책로


어쩌면 이렇게 집에만 있어야 되는 이 시간 때문에 (아니면 덕분이라고 하는 게 더 옳겠다) 이런 산책로를 발견했다. 그 전에는 주말에 차에서 울어재끼는 둘째 아기를 데리고 굳이 멀리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더 유명한 공원, 멋들어진 비치를 가는 게 뭔가 하는 거 같으니까 더 바삐 움직이며 다니느라, 우리 동네는 살피지 못했다.

대충 운동복 차림으로 유모차 끌며, 지친 마음을 달래려 나온 오늘이, 그 어떤 날보다, 그 어떤 곳보다 제대로 시간을 보낸 듯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숲길, 나무들, 호수가의 오리들이 어찌나 반갑던지. 어제 드러난 못난 심보가 이제 내게서 슬슬 떠나는 기분이다. 첫째 아들도 코에 바람이 들어가니 완전 다른 아이가 된다. 둘째는 유모차에서 아무 소리 없길래 봤더니 그새 잠들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산책로. 이제는 자주 찾는 곳이다


우리 곁에 있었지만 이제야 보이는 것들이 많다. 2020년 4월, 우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첫째 아들과 그 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니 내가 알았던 아들이 다가 아닌 게 보인다. 이 아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감성적이고, 더 많은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꽤 유머러스하다. 게다가 자기가 누군가를 웃기는 걸 엄청 좋아한다. 'Beautiful'이란 말을 참 자주 한다. 예를 들면, 산책을 하다가 나에게 쇼핑센터 길로 갈지 아니면 'Beautiful way'로 갈지 묻는다. 우리에겐 그저 평범한 작은 길이 이 아이에겐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나 보다. 내가 실수해서 미안하다고 할 때도, "Mummy, you are still beautiful."이라고 말해준다. 이 간단하지만 힘 있는 한 문장이 내 하루를 지켜준다. 아들은 집 주변 산책을 하면서도 크로아티아 섬에서 땅에 다니는 개미를 신기하게 봤을 때나, 부다페스트를 걸으며 나뭇잎을 바라봤을 때와 똑같이 감탄을 한다. 그런 아들을 뒤에서 바라보면서 일상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게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배운다.


호숫가를 걷다 보면 다른 공원과 이어지는 길


남편은 여행 후, 다시 시드니에 정착하는 시간을 힘들어했지만 일상이 주는 기쁨을 다시 배우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저녁식사 후 자기는 설거지하고 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중간중간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좋다고 한다. 집에서만 밥을 먹다 보니, 음식 솜씨도 느는 것 같아서 기뻐한다. 오늘은 한국 양념 치킨이 먹고 싶어서 나름 에어프라이어로 비슷하게 만들어서 먹었다. 남편은 치킨을 사진으로 찍으며 급 흥분 상태였다.

둘째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다. 첫째가 쳐다보니 음소거 사랑일 때가 많다. 첫째는 질투가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여 조용히 이뻐해 준다. 설거지를 하다가 눈을 마주쳤을 때, 쿨하게 씨익 웃어주는 이 아기의 미소에 바보처럼 난 실실 웃고 있다. 요즘에는 목욕하는 걸 엄청 즐겨하시고, 형아랑 아빠랑 거칠게 노는 것도 꽤 좋아한다.

이런 때가 아니었으면 알아채지 못했을 산책로, 내 곁에 일 년 내내 있었는데 이제야 눈길을 줬다. 그 길을 세 남자와 함께 걸으며, 4월도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는 기회라 여기는 시간일 거라고 말이다. 우리의 가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호주는 한국과 계절이 반대라서 4월은 가을이에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곳. 첫째 아들이 갈대숲 사이를 지나가는 걸 좋아해서 마무리 코스로 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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