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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May 12. 2020

같고 다르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주말이다. 이 시간이 기대되는 건 내가 독박 육아에서 벗어나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노마드로 여러 나라 여행하면서 일했던 남편은 시드니에 돌아와서도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집에 있어도 일을 해야 하니 평일에는 아이 둘을 혼자 돌보다가, 주말이 되면 같이 돌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 우리 가족 넷은 산책길로 나섰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계속 같은 산책길을 가곤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니 자연스레 그 길로 간 거다.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한 날


오늘은 남편이 차로 움직여서 다른 산책로를 가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나는 번거롭게 차로 가지 말고 그냥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길을 나선 지 30분쯤, 남편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도 다른 산책로가 있다며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끌었다. 뒤에서 따르던 나는 굳이 뭘 귀찮게 새로운 데를 갈까, 혼자 생각하며 묵묵히 걸어갔다. 유모차에 자고 있는 아기가 깰까 조심히 걸었고 그래서 천천히 낯선 풍경들을 보았다. 불과 몇 분 전에 들었던 생각이 금세 바뀌었다.

새로운 산책로를 눈에 담는 게 좋았다. 우리 동네를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 조금만 걸어가면 또 다른 공원이 있었고, 처음 보는 놀이터가 있었고, 고즈넉한 숲길이 또 펼쳐졌다. 일상을 여행처럼 살자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하는 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세계 여행했을 때, 처음 보는 이국적인 풍경에 매도되어 길거리를 바라보던 그 눈처럼,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우리 동네를 바라봤다.


잠시나마 일상도 여행처럼


남편과 나는 참 많이 다르다. 식당에 가면 난 늘 같은 음식을 주문하고, 남편은 매번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걸 즐기는 편이다. 난 괜스레 다른 걸 주문하면 맛이 없을까 봐 익숙한 음식을 시키는 반면, 남편은 맛없으면 다음에는 먹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연애 초반에는 우리가 참 같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물론 공통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같다. 그래서 친해지게 되었고, 대화가 즐거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사람은 나와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남편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고, 난 그에 비해 충분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남편은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얻고, 난 사람들은 만나면 에너지가 고갈된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여행을 할 때도 남편은 즉흥적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우리가 갈 나라를 추가하는 걸 별 거 아니라 생각했다. 난 원래 가려던 나라가 아니면 괜스레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거길 왜 꼭 가야 되냐고 따지곤 했다.


산책로를 찾아가는 길에 본 숲


나와 정말 다른 사람에 익숙해지는 건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연애 때, 그의 생각이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내가 생각하는 '옳은' 쪽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다가 자주 싸움으로 변하기도 했다. '나와 다름'을 그의 단점이라 규정했고, 단점에 집중할수록 그 단점은 커져갔다. 하지만 관계에서 시간이 주는 묘미 중에 하나는 바로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거다.

난 남편 덕분에 수없이 특이하고 진귀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누렸고, 나라면 절대 대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과도 재밌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라 이름조차도 몰랐던 곳들을 가보게 되었고, 농담이 주는 하루의 여유를 더 즐기게 되었다. 내가 그처럼 변한 게 아니라, 우리의 다름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보게 된 것이다.


하늘이 유난히 예뻤던 날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늘 익숙한 곳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걸어가서 볼 수 있는 풍경 덕분에 조금은 다른 하루를 보냈다. 같지만 다르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런 세계는 우리네 인생을 더 컬러풀하게 만든다. 무채색 계열인 것만 같았던 내 삶에 선명한 컬러들이 들어왔다. 우중충하다고 투덜거렸던 비 오는 날, 예상치 못한 두 개의 무지개를 본 것처럼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무지갯빛이 찾아올 수 있다.


집에서 문을 열고 우연히 보았던 그 날의 쌍무지개. 사진으로는 두 번째 무지개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아쉽다. 실물이 훨씬 예쁜 쌍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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