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한나 Aug 21. 2020

마음의 디톡스

호주 골드코스트

 처음으로 골드 코스트에 갔던 여름날이 떠오른다. 씨월드, 무비월드 같은 테마파크도 있고, 호주 사람들도 휴양지로 많이 찾는 곳이 바로 골드 코스트다. 나에게 이곳은 여름 밤바다가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다. 깜깜한 밤,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에 갔다. 그 늦은 밤 사람들이 아직도 수영을 하고 있었다. 시드니 비치는 여름이어도 물이 꽤 차가운 편이어서, 난 으레 여기도 그러려니 생각해서 밤 수영하는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웬 걸, 발을 바닷물에 담는 순간 더 이상 수영하는 사람들이 신기하지 않았다. 물이 엄청나게 따뜻했다. 그 한여름,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따뜻한 물에 반해버렸다. 골드 코스트는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다는 사실을 듣고는 농담 삼아, 우리 나중에 은퇴하면 여기 와서 살까 하며 대화한 기억이 난다.


골드코스트에서 제일 유명한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


이 농담이 현실이 될지는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골드코스트에 살게 되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살아서 외로웠던 것도 사실이고, 정착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해변은 충분히 아름답다. 마음이 답답할 때 햇빛에 비쳐 반짝 거리며 남실거리는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괜찮아 지곤 한다. 자연의 힘이 이거다. 사람을 위로해 준다. 그 어떤 격려의 말보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 고민들은 점점 작아진다. 그래서 골드 코스트가 좋다.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도시이다. 북적거리는 시드니에 비해 사람도 덜하고, 교통체증도 덜하다.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


서퍼스 파라다이스 비치, 브로드 비치, 벌리 헤드 비치를 몇 주동안 지내며 여행하다가 제일 한적한 벌리 헤드에 6개월간 살기로 계약했다. 사실은 브로드 비치 쪽을 더 많이 알아보고 벌리 헤드 쪽은 집 구경을 단 한 곳만 했는데, 보자마자 여길 선택했다. 사람들이 덜 있고, 해변은 가장 예쁜 동네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버스 정류장에서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내리는 순간,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구나, 싶은 동네였다. 몇 주 동안 여기저기 집 구경하고 선택의 선택을 해야 해서 지친 우리가 둘 다 동시에 마음이 편해지는 동네였다.


벌리 헤드 비치의  산책로. 이 동네에 살 때 나의 최애 장소였다.


사람 마음은 참 재밌지 않은가. 세계 여행하는 내내 그토록 원했던 정착이란 걸 6개월이나마 하기 시작했는데도 내 마음은 생각했던 것만큼은 기쁘지 않았다. 물론 간절히 원했던 걸 하게 되면 오히려 공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런 마음일 줄은 몰랐다. 이런 마음을 이미 경험했을 지희 언니에게 물었더니, 장기 여행 후에 잠시라도 정착을 하면 “마음의 디톡스”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으니 그런 마음을 내버려 두라고 말이다. 참, 난 내 마음을 가만두지 않는구나. 생각했던 대로 생각이 흐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든지 마음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허무하다면 그 마음을 내버려 두고 당분간 허무함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싶다. 굳이 억지로 흔들지 말고 마음에게도 시간을 주고 싶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타이밍에 필요한 무언갈 깨닫고는 하니까 말이다.


산책로에 올라 가면 볼 수 있는 뷰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왜 난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은 걸까,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유가 없는 걸까 아님 내가 모르는 걸까. 그러다 문득 스치듯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을 잘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걸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아직 가지지 못한 직업, 가지지 못한 경제적 자유와 같이 아직 가지지 못한 걸 계속 생각하다 보면 오늘의 자리는 없어진다. 과거에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생각나고, 미래에 해야 할 일들이 물밀듯이 내 머릿속을 침투한다.

그 날 아침 일찍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해변가로 나왔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사실 그것만으로 감사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라테를 사서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아마 새벽부터 나왔을 서퍼들을 바라본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파도를 타다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과 벌써 서핑을 끝내고 물로 씻고 있는 사람들,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을 하고 있는 사람들, 천천히 산책하고 있는 노인들, 내 느낌인지 몰라도 모두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 에너지가 전달되었는지 몰라도, 나도 오늘은 오늘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진 것- 피곤하지만 건강한 몸과 건강한 가족, 날 웃고 울게 만드는 아들, 작지만 소중한 내 꿈- 그것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채워진다. 채워진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겠다. 오늘 하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다.


벨리헤드. 6개월 동안 살았던 우리 동네. 골코에서 다른 비치보다 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했던 비치.


이전 18화 조금 더 머물지 않았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