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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l 06. 2022

결국, 자기가 결정하는 삶

달아나도 괜찮아

나는 돈을 쓰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학원에 다니는 2년 6개월 동안 내 모든 비상금을 탕진할테다. 다짐했건만,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줄 안다고 했던가. 나는 어디에 돈을 써야 할지 한참을 헤맸다.


운동을 시작할까? 아이들과 남편,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거라면 좋겠다.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런 운동을 하지요.'라고 답할 만한 거라면 더 좋겠다.

 

골프를 시작했다. 바야흐로 골프가 MZ세대의 인기를 얻으며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에 골프를 치는 친구들도 늘고 있으니 함께 라운딩을 가도 좋을 것 같다. 한 지인은 대학생이 된 아들과 함께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니, 나도 아이가 장성했을 때 골프를 매개로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면 좋으리라.


대학 때 교환학생으로 간 미국 대학에서 스포츠 수업으로 골프를 두 학기(2 quarters, 6개월) 수강했더랬다. 조금 칠 줄 아니까 제대로 레슨을 받으면 일취월장하겠지. 비싼 레슨비에 연연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1대 1 강습을 등록했다. 웬걸 나의 운동신경을 간과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학창 시절 체육 실기에서 100점 만점에 겨우 70점대를 면치 못하던 나였다.


 “와우~ 골프 영재인데요. 왜 진작 시작하지 않으셨어요.”


딱 거기까지였다. 나의 실력은 15년 전 배우다 그만두었던 그 시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내가 초조해지는 만큼 코치도 초조해졌다.


 “아니 몸이 왜 저러지?”

 “저도 제 몸이 왜 이런지 알 수가 없어요.”


어려서부터 운동이라면 못하는 게 없었다던 코치는 회원의 몸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어려서부터 운동이라면 잘하는 걸 꼽기가 어려웠던 나 또한 본 대로 따라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슨을 받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였다. 코치와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핑계로 골프 강습을 그만두었다. 진통제를 먹고 찜질을 해도 낫지 않던 손가락, 손목 통증은 스트레스와 함께 사라졌다.


골프는 나에게 이롭지 않은 스포츠였다. 허리디스크로 고생했던 내가 골프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사진 때문이었다. MZ세대를 겨냥한 감각적인 골프복을 입고 찍은 사진들. 나도 사진 속 누구처럼 상큼하고 발랄하게 차려입고 펼쳐진 초원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싶었던 거 같다. 그래서 누가 물어보면 “네, 골프가 취미예요.”라고 턱을 치켜들고 말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나를 위한 소비를 생각하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운동을 선택한 결과, 의미 없이 비싼 레슨비를 날렸고 몸살을 앓을 만큼 손목 통증을 앓았다.     



페터 비에리의 『자기결정』(2015, 은행나무)을 만난 건 토론 모임에서였다. 책에 대해 토론하던 중, 책을 추천한 나 선생님은 자신이 그동안 왜 산을 오르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가 “등산을 왜 좋아하나요?”라고 물으면, 항상 “그냥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중년의 직장인인 그는 너무 오랜 시간 본인의 욕구나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실존적으로 불안한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고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실존적으로 고독한 개인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와 책임'을 가진다. 실존적 불안을 이겨내고 '진실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개인은 '자기 인식 능력'을 키우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 내야 한다.


페터 비에리는 책에서 바로 이 ‘자기 인식’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역설한다. 자기 인식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스스로 결정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그토록 학교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방황했다. 공부 잘하고 부모 말씀에 따르는 아이, 상사에 충성하고 조직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직원, 아이에게 헌신하고 가정에 충실한 아내.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될 수 없는 모습이 되지 못해 괴로웠다.


다행히 나는 일어나서 달아났다. 도망치는 길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헤매는 마음을 잡기 위해 책을 집었다. 나를 관통한 무수한 이야기는 내가 되어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페터 비에리는 읽는 행위가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쓰는 행위는 표현하는 행위로써 자기를 인식하게 한다고 덧붙인다. 읽으면서 나는 무엇이든 되는 상상을 했다. 쓰면서 나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나는 내가 창피했다. 현실에 벗어나려 안달인 나의 한계가 부끄러웠다. 달아난 곳에서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던 순간,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한 망설임이었음을 이제 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 뿐이다.


때로 나는 누군가의 성공을 따라 하려고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따라 아이를 낳는다든지, 경매의 신을 따라 덜컥 부동산을 매입한다든지, 제니가 멨던 가방을 따라 사려고 한다든지, sns 사진을 보고 골프를 시작했다든지 말이다. 나는 이제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되려고 한다. 체력적으로 건강해지고 싶다. 그러기 위해 수영을 하고 틈나는 대로 걷는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에 환호한다. 남편과 오래도록 협력하고 애정하는 관계이고 싶다. 같이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함께 해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나의 가치를 제일 우선에 두는 사람이고 싶다. 생기 있게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내가 결정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에리는 자기결정을 통해 존엄성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디에서든 자신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현실 세계에서 자기인식을 거쳤더라도, 자신만의 존엄성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더라도, 자기를 포기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의 개별적 존엄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집을 나설 때, 대학원에 합격하고서도 비싼 등록금에 망설일 때, 작업실을 갖겠다는 무모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을 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 준 수많은 인연이 떠오른다. 덕분에 용기내어 한 걸음을 내딛었다. 혼자만의 글쓰기에서 소통하는 글쓰기로 나를 확장할 수 있었고,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의미 있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가치 있고 존엄한 존재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면 괜찮다.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향해 한걸음 내딛자. 같이 달아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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