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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라샘 Oct 07. 2024

대학교수로 추천되었다. 결국...

빛을 잃은 소녀

"딸아! 엄마 대학교수 될 것 같아~"

지금까지 한 길로 달려온 나를 이제야 알아주는구나! 그동안 멈추지 않았던 나의 열정이란 문 앞에서 들리는 반가운 노크소리. 학교 측에서 요구한 이런저런 서류를 준비하면서 신나고 두렵고 설레고 흥분되었다. 대학교시절 편해 보이는 교수님들을 보고 '나도 대학교수가 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함에 그들의 이력을 보고 바로 포기했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스쳐 지나갔던 나의 짧은 장래희망에 불이 지펴지는 감격적이고 믿기지 않은 기회를 만든 스스로가 대견했다. 정말 많은 지역센터와 관공서 출강 경력,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각종 대회에서의 수상이력. 꾸준한 개인전과 초대 작가전. 기특하다 울라야.

그런데 후보 중 한 명이라고 왜 알지 못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조금 설레발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싱겁게도 한 달 동안 나를 설레게 한 대학교수직 에피소드는 막이 내렸다. 하지만 난 서류준비했던 짧은 날들이 너무나 행복했었다고 기분 좋게 회상한다. 아니, 포장한다. 열심히 쌓아온 실력과 경력을 인정해 연락을 준 대학 측에 감사하다. 이런 기회... 또 오지 않을까? 그때는 흥분 가득 설렘 말고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노련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25년이 넘는 동안 넘쳐나는 강사경력, 도예작가로서의 경력이 탄탄했음에도 그 자린 결국 나의 자리가 아니었다. 학력 때문이었을까 하는 자격지심이 올라온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고등학교 때 공부가 좋아진 늦깎이 공붓벌레였다. 그림을 좋아하는 내가 고교 디자인과로 진학하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리고 공부도 재밌었다. 시험날도 좋았고 친구들, 선생님도 좋았다. 이런저런 상도 많이 받았고 학년장이란 감투에 장학금도 받았다. 고등학교의 모든 것이 즐거운 18세의 울라는 빛이 났었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 그림과 글만 써왔던 나에게 모든 과목이 생소했고 특히 수학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수능점수에 따라 대학을 지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적에 밀려 밀려 들어간 대학일지라도 빛이 나던 18세의 울라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신나게 놀았다. 성적이 좋아 장학금도 타고 과대표도 되었다. 거기에 산악동아리 활동으로 산에 미쳐 살며 청춘을 불살랐다는 말 그대로 20대 초를 만끽했다. IMF가 올 줄은 꿈에 도 모르고.

타고난 장사꾼인 엄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우리 지역 1호 노래방을 차렸을 정도로 엄마는 돈 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90년대 초 부산 사하구에 도시가스가 들어오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는 교실에서 나를 포함해 겨우 두 명일 정도로 개중에 난 잘 사는 집 아이였다.


하지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대학 마지막 졸업학기. 난 어찌하다 보니 복학생이 되었고 등록포기를 목전에 두고는 결국 교수님 보증으로 학자금대출을 받게 되었다. 부도, 빨간딱지, 끊임없는 전화벨소리와 엄마의 울음소리 그리고 바닥으로의 이사... 그렇게 난 스물두 살에 빛을 잃었다. 어떤 날은 학교에서 점심 값이 없어 텅 빈 산악부 동아리방에서 후배들이 남겨놓은 라면이나 초코바를 먹으며 시간을 때워야 했다. 그 마저도 있으면 다행이다. 무슨 60년대 드라마 속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물로 배를 채운 다는 건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말을 걸어주던 낯선 과선후배들에겐 이유 없이 가시를 세우고 스스로를 왕따 시켰다. 그래서 난 지금껏 도예과 동기들과 교류가 없다. 겉도는 나를 챙겨주려고 하는 말에 아니, 싫어... 를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혼자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졸업 직전 제1차 대학생 대상 청년 공공근로 사업에 선정되어 바로 일을 시작하면서 어떤 미련인지 해마다 편입원서를 내고 합격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포기하기를 3년. 늦깎이 공붓벌레는 공부가 너무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응시료조차 나에게 부담일 정도로 그 당시 돈이 말라있었다. 일을 하고 있었지만 밑 빠진 집안 살림에 모두 들어가야 했으니까. 그러던 중 도예과 교수님 추천으로 집을 떠나 객지에서 도예실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오게 된 것이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작년 교수직 에피소드로 인해 못다 학구열이 강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이젠 25년 전 응시료조차 부담되었던 내가 아니다. 공부는 때가 없지 않나?! "고오야! 엄마 다시 학교 다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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