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소담유리 Apr 08. 2020

저는 ‘아픈 엄마’입니다

출산과 암수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아픔

출산 한 달 후 알게 된 갑상선암. 그리고 암수술 후 독박 육아와 함께 찾아왔던 극심한 우울증까지.. 나는 내가 알지 못 한 사이에 아픈 사람이 되었고, 감추느라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지만 나는 환자였다.


엄마라면 누구나 다하는 출산이라지만 출산은 여자였던 내가 엄마가 되는 과정으로 극심한 몸의 변형을 가져다주었다. 몸무게가 17kg이나 불었고, 커다란 배를 안고 10개월의 과정을 거쳤다. 아이의 몸무게는 4kg, 그 아이가 내 몸속에 있었으니 나의 내장기관이나 골격이 제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4kg의 축구공을 뱃속에 넣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려나?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면서 4kg의 우량아를 품속에 안았다. 아이를 품은 기쁨도 잠시, 신생아를 보며, 초보 엄마로 모유수유를 하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육아를 하던 한 달 간의 일상 뒤에 우연히 찾은 병원에서의 갑상선암 선고는 ‘청천벽력’ 이였다. 아이를 낳고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나의 몸에 또다시 수술이라는 큰 충격이 가해져야 했다. 신생아를 둔 엄마에게 암수술이란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출산 6개월 만에 갑상선암 수술을 했다.


 그렇게 큰 충격과 함께 시련의 날들은 계속되었다. 암수술 후 분가를 하게 되었고, 아이가 8개월 될 즈음부터는 혼자서 독박 육아를 하게 되었다. 연고가 없는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과 독박 육아는 정말 외로웠다. 늘 바쁜 신랑은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었고, 연고가 없는 곳이라 말 붙일 사람 하나 없었다. 설상가상 수술 후유증으로 불균형한 갑상선 수치와 현저히 낮은 칼슘 수치는 안면근육의 마비를 가져왔다. 아픈 것을 참고 또 참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 포장하느라 아프다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 했다. 많이 아팠던 나는 아이를 키우며 몇 번의 응급실행을 맞기도 했다. 자라나면서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보지 않을 만큼 건강이라면 자신만만했는데 살면서 이때만큼 병원을 많이 가본 적도 없을 것이다.      

 

독박 육아의 길은 참 멀고도 힘들었다. 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돌보아 주어야 하는 엄마인 내가 갑상선암을 앓으면서 피곤함에 지쳐 쓰러지는 일들이 생겼다. 아이와 나 단둘의 생활에서 엄마인 나의 아픔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야생마적 성향을 타고난 남자 아이라 늘 에너지 넘치는 행동과 강철 체력을 과시하며 아이는 점점 더 커갔다. 아이가 클수록 나의 체력 또한 채워졌어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가 클수록 엄마인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에 벅찬 일들을 나 혼자 다 해나가야 했다. 체력이 채워지기는커녕 고갈되기만 했다. 육아는 주말도 없었다. 주말이면 더 뛰어다녀야만 했던 우리 아이 육아에서 내 체력은 바닥이었다. 육아는 체력전인데 나는 이미 체력으로 밀려있었다.          


 나는 순간순간 밀려오는 피곤함에 미칠 듯 힘들었다. 그 힘든 순간을 표현하지 못하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다 더 많이 아팠다. 내 아픔은 화가 되었고, 모든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 아픈 엄마인 나는 육아를 하면서 아이에게 내 아픔의 화풀이를 했다. 피곤에 지쳐 있는 나에게 아이의 작은 실수는 실수가 아닌 반항이었고, 남들보다 덩치가 컸던 우리 아이의 어리광은 힘겨웠다. 부부싸움 다음날 어김없이 아이는 내 눈의 가시였다. 아이 때문에 늘 집에만 묶여 있는 것이 싫었고, 아이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 그전과는 전혀 달라진 내 삶이, 내 몸이, 내 아픔이, 이 모든 고통이 아이로 인해 생긴 것 같았다. 바보같이 아이 때문이라며 늘 아이 탓을 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가장 행복해야 하는 시기에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 겪었고, 아팠다. 아픔을 참으며 육아를 했고, 그 인내심이 육아를 하는 내내 고통으로 다가왔다. 고통이 커질수록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아이에게 그 고통을 다 토해 냈고, 아이는 그것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 악순환은 계속되었고, 육아는 전쟁이었다. 그저 육아의 전쟁터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이었다. 나의 육아 속에는 나도 아팠고, 아이도 아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