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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Jul 20. 2020

부모에게서 받은 아픔, 대물림하긴 싫었다

내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은 아픔

어린 시절부터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우리 집, 결국 부모님께서는 이혼을 하셨다. 그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사실 정확히 물어본 적도 없다. 그저 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 23살이었던 나는 아빠의 폭력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엄마를 피신시켰고, 강제 이혼을 강행하게 되었다. 더 이상은 아빠의 폭력도,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가족이 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서도 자신만의 인생이 있을 텐데 늘 ‘자식들 때문에 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에 이리저리 치이며 힘들었던 나는 너무 자신들만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지쳐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성인이 된 내가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의 이혼을 진행했다. 나의 그 최선이 내 인생 최고의 아픔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우리 집은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아빠의 폭력과 외도는 언제나 부부싸움이 되었다. 소리 지르고 욕을 하시며 싸우시는 부모님. 어느 날은 부엌칼을 들고 싸우시는 부모님을 본 적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인데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나이 어른들을 이길만한 힘이 없었던 나는 싸움을 말릴 수도 없었다. 너무 무서웠고, 공포였다. 그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 울기만 했다. 매일같이 싸우시는 부모님의 영향이 나에게 대물림될까 두려웠던 적도 많았다. 가장 반항아적 성향이 두드러졌던 중학교 2학년쯤엔 아빠의 폭력을 보며 한마디 던지기도 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데 내가 엄마처럼 아빠 같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좋겠어?”라고 아주 당돌하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라며 만취 상태의 아빠가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씀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워 온 딸인데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했으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그나마 딸이 귀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가족들에게는 강인하고, 때로는 ‘독단적이다’ 싶을 만큼 가부장적인 아빠였지만, 딸에게만큼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딸인 나에게는 절대 매를 들지 않으셨다.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꽁한 성격의 딸이 반항이라도 할까 봐 피하셨던 건지도 모른다. 사춘기 시절 반항으로 친구들과 놀다 집에 늦게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우리 집은 9시가 통금시간이었는데 반항하던 시절엔 그 시간을 훌쩍 넘기며 놀다 늦게 들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잠도 주무시지 않고, 딸이 들어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셨다.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담배만 연신 태우시면서 말이다. 내가 늦게 귀가한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아빠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통통 튀는 성격의 딸이라 직접적으로 말은 못 하고, 늘 노심초사하셨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여전히 힘든 나는 그 상처를 안고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에게 같은 상처를 물려주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늘 불안하고 힘들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좋은 부모의 그늘 아래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었다. 나의 아픔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아이에게 대물림해주고 싶은 부모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아이를 가진 그 순간부터 “내 어린 시절의 아픔을 아이에게만은 절대 물려주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과거 내가 겪었던 아픔을 내 아이가 겪지 못하도록 미리 나서서 막으려는 많은 노력을 했다. 그 노력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생각하고, 미리 걱정을 하고, 그 일들이 일어났을 경우를 대비해 어떻게 처신을 하겠다는 그 모든 상황을 구상하며 시나리오를 짜냈다. 어이없는 나의 시나리오는 힘든 나를 더욱 괴롭혔다. 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니 현실은 그만큼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육아에, 갑상선암의 피곤함에 지쳐 있던 나는 늘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신랑과의 마찰이 많았다. 분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신랑과 시작된 사소한 말다툼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던 그때, 이미 서로 맘 상할만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신랑이 앉아 있는 나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물건 하나를 던졌고, 내 다리에 정확히 맞았다. 사실 아픈 건 아니었지만, 물건을 던졌다는 그 행동 자체가 참을 수 없었다. 나의 격해진 감정에 기름을 부은 신랑의 행동에 나는 활활 타올랐다. 그 자리에 일어선 나는 책상 위에 있던 모니터부터 시작해 모든 물건을 싹 쓸어내리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나한테 물건을 던질 수 있어? 내가 맞았으니 이건 폭력이야!”라고 하며,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고의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 순간 내 몸에 스친 그 물건 하나에 어린 시절 보았던 폭력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폭력의 끝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알고 있었던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부부싸움에서 내가 느꼈던 큰 공포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결국 나의 공포를 먼저 눈치챈 신랑이 미안하다며 진정시켰고, 싸움이 종료되었다. 어찌 보면 참 사소한 일 하나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의 공포를 데리고 온 것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 시절 그 어느 날로 돌아가 나는 친정엄마가 되고, 신랑은 친정 아빠가 되어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의 부부싸움이 나에겐 얼마나 공포였는지 모른다. 신랑이 빨리 제재해주지 않았다면 나의 공포는 더욱더 커졌을 것이다.      


 아직도 뉴스나 신문기사를 보면 아버지의 폭력이나 부모님의 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폭력으로 인한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또한 그런 부모님의 폭력이 아이들에게 혹은 부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도 사례들이 많이 나와 있다. 폭력에 대한 기억, 폭력에 대한 공포는 언제 어느 순간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단, 이런 폭력에 관한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니 잘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순간 나타나 나에게,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나는 신랑과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폭력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나, 대처하는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 전 그 아픔만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82년생인 나는 가부장적이었던 80년대를 살아왔다. 그때는 아버지의 폭력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그 당시는 힘든 일을 하거나 술을 먹는 아빠들이 많았고, 술은 언제나 폭력이 동반되기 마련이었다. 또한 행복을 위해 살기보다는 살아내기 위해 불행을 감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에게 행복을 가르치기보다는 불행하고 힘든 부모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가끔 들리는 말로 ‘니들 때문에 살지’, ‘니들 밥 먹여 주느라 허리가 휜다’ 등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식이란 존재가 있음으로 더 힘들다는 표현을 많이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린아이였던 내가 들은 그 표현들은 모두가 상처였다. 나 때문에 또 싸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부모님의 싸움 그다음 날의 후폭풍이 늘 신경 쓰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부모님의 삶에서 가난을 보았고, 불화를 보았고, 폭력을 보았다. 행복했던 기억보다는 불행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리고 부모님의 이혼은 내가 겪은 최대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젊은 날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고, 자식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내 나이 서른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다 보니, 육아를 통해 순간순간 나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면 가슴이 답답하고, 많이 아팠다. 이미 한참이나 지나버린 일들이지만 생생하게 기억날 때면 그 공포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정말이지 나는 내가 받은 어린 시절의 이 아픔들만은 내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부모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려 많이 노력했고, 육아 또한 늘 다른 방식을 대입했다. 내 삶에 늘 부모님의 삶을 끌고 와 살아 내려했던 것이다. 참 바보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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