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하면서 집순이 주부가 되었고, 연고 없는 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혼자였던 내게 가족이 생겼고, 엄마가 되었다. 행복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은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육아의 전쟁터가 되었다. 좋았던 부부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특히나 내게 힘들 기만했던 육아는 육아 우울증과 함께 올가미를 감은 듯 숨 막히고 답답했다. 하루하루 암울하기만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루 온종일 아이만 보고 있으려니 점점 더 지쳐 가기만 했다. 내 인생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이 육아를 하면서 내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 내 삶이 아이 때문에 바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을 하고 달라진 나의 삶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꿈꿔왔던 삶과는 자꾸 멀어져만 갔다. 나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살기 시작했다. 늘 아이와 함께여야 했고, 내가 아닌 아이 위주의 삶이 계속되었다. 햄버거와 콜라처럼 우리는 마치 세트 메뉴인 것만 같았다. 아이만을 바라보며 견뎌야 하는 내 삶의 모든 것들이 고통으로 느껴졌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있는 내 아이가 내 삶의 훼방꾼인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아를 통해 ‘희로애락’을 맛본다고 한다. 그만큼 아이를 키우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한데, 나의 육아에는 ‘로’와 ‘애’만이 존재했다. 즉 기쁨과 즐거움은 없었고, 노여움과 슬픔만이 함께였다.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노여움, 실수에 대한 노여움,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것에 대한 노여움, 남다른 성향으로 늘 마찰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노여움 등... 아이에 대한 노여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파내고 파내도 다시 차오르는 샘물 같았다. 나의 노여움은 그랬다. 그저 말할 곳이 없어 속으로 삭히려니 답답함에 눈물이 쏟아졌다. 끊임없이 실수하는 아이를 보며 그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귀찮고 화가 났다. 엄마의 노력에도 따라와 주지 않고 남들보다 느린 성장을 하는 내 아이의 모습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또한 야생마적인 성향으로 태어난 남자아이를 공주처럼 예쁘게만 키우려고 하다 보니 늘 아이와 나는 어긋나기만 했다. 이런 현실들이 너무 슬펐다. 언제부턴가 나는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그 모든 노여움들이 나의 우울증의 원인이 되었다. 매일 같이 눈물을 쏟아 냈지만 끊임없이 차올랐다. 내 슬픔의 크기는 깊이는 알 수 없는 우물 같았다. 정말이지 육아를 통해서 원 없이 슬픔을 맛보았다.
잘 생각해보면 아이는 잘못이 없었다. 여느 아이와 다름없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만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다. 또한 엄마의 욕심이 컸을 뿐이지 성장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니 아이는 자신에게 맞게 성장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라 실수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고, 엄마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런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너무 우울한 일이었다. 그 우울한 시간을 아이와 함께했으니 내 우울증의 원인을 아이에게서만 찾으려고 한 것이다. 내 눈앞에 보이는 아이가 우울증의 원인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사실 나는 힘들 때 도와줄 가족이 필요했고, 나와 대화를 잘해주는 신랑이 필요했다. 편하게 내 마음을 터놓고 수다를 늘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내가 우울하고 힘들 때 나를 돌봐 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활의 모든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친정도 시댁도 멀었으며, 바쁘게 일을 하는 탓에 신랑은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다. 나의 몸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피곤함은 배가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 모든 상황에 화가 났다. 내 안의 가득 찬 노여움이 아이를 향해 저격하고 있었다. 마치 놀이동산에 있는 풍선 터트리기를 하는 것처럼 아이의 단점을 색색깔 풍선이라 생각하고 하나씩 겨냥해서 맞추고, 터트렸다. 내 감정이 터질 때마다 아이는 더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내 우울증의 최대 수혜자가 다름 아닌 내 아이가 된 셈이다.
8년의 육아를 뒤돌아보니 나는 순간순간 아이를 ‘내 삶의 훼방꾼’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 육아를 하며 아이가 젊은 날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낸 것만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아이를 낳은 그 순간부터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 더 그런 생각들을 한 것 같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육아는 처음이라 그 속에서 수많은 착오를 경험했다. 경험이 계속 쌓이다 보니 이제는 무엇이 착오였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수도 없이 아이가 ‘내 삶의 훼방꾼’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