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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Jun 10. 2020

튀는 아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야생마적인 성향을 띄는 남자아이, 부담스러운 시선

"남자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야생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드넓은 초원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을 늘 갈망한다. 남자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뛰는 것은 남자아이들의 야생마적 성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하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 성향으로 평생을 살아온 엄마가 야생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남아 미술치료 전문가 최민준 원장의 ‘아들 때문에 미칠 것 같은 엄마들에게’라는 강연에서의 일부분이다. 그랬다. 최민준 원장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 아이는 지극히 야생마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런 우리 아이의 튀는 행동을 한평생 여자로 살아온 내가 이해하지 못했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좀 튀는, 좀 유별난 성향의 아이를 보면 지적을 하고, 제재를 가한다. 그것이 눈치를 주는 것이든, 말로 타이르는 것이든 말이다. 요즘 어른들은 보면 알게, 모르게 아이들을 보며 비교하고 평가를 한다. 그 평가와 비교를 통해 어른들이 만든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문제아’로 낙인찍어버린다. 아이를 그 자체로 봐주지 않는다. 어른들의 기준에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이 정답일까?’      


 나는 남다른 아이를 키우면서 불합리한 일들을 참 많이 겪었다. 친구와 카페라도 갈라치면 뛰거나 소리 지르는 우리 아이는 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고, 엄마 말 잘 듣고 앉아서 스마트폰만 보는 다른 아이는 칭찬을 받았다. 키즈 카페에서는 또래보다 등치가 크고, 행동 자체가 남들보다 컸던 우리 아이는 상대방 아이가 먼저 잘못을 했음에도 결과에 따라 먼저 혼나게 되고, 사과를 하게 되는 불합리한 상황들이 많았다. 어떤 엄마들은 전후 상황을 묻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맞아 우는 것만 보고 우리 아이를 다그치기도 했다. 우리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강요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친하게 지내던 주위 사람들의 어이없는 반응들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있었다. 대체로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만나 어울리던 사이였는데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지인도 나도 남자아이를 키우니 같이 놀아도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내게 돌아온 거침없는 지인의 말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듣기엔 말에 가시가 있었다.


 “미안한데, 우리 아이는 너희 아이와 성향이 달라서… 같이 놀면 부딪힐 거야.”


 ‘성향이 달라서 어울릴 수 없다? 누가 정한 것일까?’ 그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본인의 아이들은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격하고 날뛰는 성격의 우리 아이와 놀면 아이들끼리 부딪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본인의 아이들이 불리할 거란 이야기였다. 이해를 하려 들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성향에 따라 분류해서 같은 부류의 아이들끼리만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일까? 남들보다 조금 더 튀는 성격을 가진 우리 아이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아이들만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아이에게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도 나눠서 만나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만들었던 그날의 일은 내 가슴속에 상처가 되었다. 이후 사람을 만나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꺼려지고, 아이를 데리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을 한정 짓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상처를 받았고, 점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까다로운 성격에 자존심이 강한 내가 늘 아이의 잘못을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별난 아이로만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우리 아이의 다름을 나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남들과 다른 아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 이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나에게 날아오는 비수를 다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아 사람들을 멀리하고, 만남을 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와 둘이 은둔 생활을 지속했다. 따지고 보면 아이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혼자만의 자격지심으로 죄인인 듯 숨어 지낸 것이다. 이 시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우리 아이의 행동과 남다른 성향이 내겐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더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고, 어느 순간 나는 아이를 이해하고 싶어 졌다. 육아에 관한 강연을 찾아가서 듣고, 육아 지침서를 읽었다. 조언도 많이 구했다. 그러면서 차츰 이 모든 상황이 아이의 잘못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의 성향이 모두 같을 순 없다. 특히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남들과 같은 성향을 지녀야 한다고 강요할 필요도 없다. 남다른 아이가 있을 수 있다. 아니, 찾아보면 주위에 꼭  남다름을 지닌 아이들이 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아이의 남다름은 성향일 뿐 문제는 어른들의 나쁜 시선이다. 아이는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제발 본인들의 시선을 우리 아이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좋겠다. 남들보다 좀 더 산만하더라도, 에너지가 넘치더라도 그것은 성향일 뿐 문제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다른 아이의 성향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의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나는 잘못된 어른들의 생각을 바꾸고 아이들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또한 남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를 하면서 아이의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고, 그저 부끄러워하며 아이의 잘못인 양 다그치기만 했던 나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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