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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Jun 04. 2020

아이의 아픔, 더 아픈 엄마

좋은 엄마 되기! 아픈 엄마에겐 어려운 이야기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던 4kg의 우량아였던 첫째 아이는 지극히 야생마적인 성향을 타고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에너지가 넘쳤고, 튀는 행동을 많이 했다. 난폭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래 아이들에게 폭력성도 보였다. 아이의 넘치는 에너지는 뛰기, 소리 지르기를 통해 온몸으로 분출시켰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물건 집어던지기 등 늘 위험한 행동을 일삼았다. 사회성이 부족했던 아이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큰 등치에 무엇이든 격하게 하던 행동들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이집을 가든, 외출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 아이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았다.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들의 표적이 되어있었다. 그 속에서 불합리한 상황들도 있었다. 먼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결과에 따라 우리 아이가 먼저 혼나기도 했고, 본인의 아이를 대변해 “미안하다.”는 말을 강요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 아이의 입장이나 문제가 일어난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그 외에도 아이의 산만함을 문제 삼아 병원이나 아동센터를 권유하기도 했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그 모든 상황들은 점점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갔다.     

 

아이는 어린 나이부터 틱 증상을 보였다. 처음에는 눈 깜빡임으로 시작했던 것이 어깨 들썩임과 기침으로까지 나타났고,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그 행동의 크기가 커졌다. 7살 때 유치원을 옮겼던 시기에는 틱 증상이 가장 심하게 나타났었다. 눈 깜빡임, 어깨를 들썩임, 기침까지 모두 나타났다. 누가 봐도 틱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는 어깨 들썩임의 행동이 커질수록 스스로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불편해했다. 틱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틱의 횟수가 늘어나고, 행동이 커지면서부터 어딜 가나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의 모습을 안타깝게 보기도 했고, 불쌍한 듯 보기도 했다. 거기에 아이의 모습을 보며 무심한 듯 한 마디씩 거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른들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지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싫었고, 가슴에 못 박는 듯한 그 말들이 무서웠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상처 받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아팠고,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서럽고,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나는 세상과 등지고 있었다. 엄마인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지만, 아이의 틱은 정말이지 숨기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 남들의 눈을 통해, 입을 통해 우리 아이의 단점들을 참 많이도 들었다. 나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이의 단점은 다름 아닌 엄마인 나로부터 전달된 아픔의 상처들이었다. 부모와의 애착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그 당시 아이는 어렸고, 세상에 전부였던 엄마는 아팠다. 그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아이는 늘 엄마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엄마의 다정함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어린 나이! 그 마음을 모두 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아이는 온몸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냈다. 울음으로, 위험함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떼 부림으로 말이다.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우려고 하다 보니 늘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목말라했고, 의도치 않게 그것이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더 문제아가 되어갔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아이와 함께 아동심리센터에 1년간 다녔다. 엄마가 다 어루만져주지 못하는 부분을 놀이 치료를 통해 해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년간의 놀이 치료는 생각했었던 만큼의 성과를 나타내지 못했다. 꾸준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소득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던 육아로 나는 더 지치기만 했다. 결국 아이와의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힘들었다. 이상하리만큼 내 눈엔 늘 아이의 단점들만 보였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하루 종일 아이의 단점만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뿐만 아니라 별일 아님에도 아이를 다그치고, 화를 내는 일이 많았다. 나는 책에서 상담을 통해서 배운 대로 ‘사랑을 듬뿍 줘야지, 화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게 행동이 따라와 주질 않았다. 잘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나는 듯 보였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만 했다. 어디 하나 하소연할 곳 없었던 나는 참 많이 힘이 들었다. 잘 살기를 바랐던 아이의 삶도, 행복하기를 바랐던 나의 삶도 모두 다 엉망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리석게도 아이를 내 삶의 훼방꾼이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아픔이 많았다. 아빠의 외도와 폭력, 가난, 끊임없는 불화, 부모님의 이혼 등 그 아픔들은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여 살아가는 내내 꽉 막힌 가슴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 아픔을 감추려 안간힘을 썼다. 누가 내 아픔을 들춰낼까 봐 늘 마음을 졸였다. 부모님 앞에서는 괜찮은 듯 굴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분노는 참을 수 없었다. 원망도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던 나는 젊은 시절 어느 한의원에서 화병이 있다는 진단도 받았었다. 예민한 데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다. 괜찮다며 나 자신을 겨우 추스르며 살아왔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이 되어 있었다. 나의 아픔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늘 한쪽 가슴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때가 되어 결혼을 했고, 결혼 후 바로 출산을 했다. 그렇게 내 아픔들을 한쪽 가슴에 품은 채 나는 부모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좋은 부모의 그늘 아래서 행복하게 사는 아이로 자라게 해주고 싶었다. 나의 어린 시절 불행했던 기억과 아픔을 절대 내 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아이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았고, 부모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 보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노력은 언제나 현실보다 앞서 나갔고, 불안했다. 나를 바꿔보고자 함이 아닌 아이를 다그치고, 변화시키려 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늘 답답했고, 화가 났다. 또한, 어느 순간 찾아온 무기력함은 내 맘속에 ‘철창 없는 감옥’을 만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늘 나를 그 감옥 안에 가두고 걱정과 근심을 키워갔다. 좋은 엄마는커녕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창피할 정도로 나는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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