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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소담유리 Oct 05. 2020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불편함

육아의 시선

 “당신은 사는 동안 남의 시선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고 있나요?”


나는 그랬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혹은 선생님께 남을 의식하고 살아가도록 배웠다. ‘너는 아이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사람들 많은 곳이니까 울면 안 되지’, ‘너는 학생이니까 그렇게 입고 다니면 안 되지’ 등등 기억하고자 하면 무수히 많은 ‘... 하면 안 되지’ 그 말의 뜻은 다름 아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예의라 배우며 살았다.      


 학창 시절 짧은 옷을 입고 외출을 했다가 부모님의 지인의 연락에 아버지께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냥 내가 입고 싶어서 입었던 것뿐인데 부모님께서는 화를 내셨다. 그리고 언젠가 사람들 많은 곳에서 내가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 많은 곳이야. 뚝 그쳐.” 내가 왜 우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눈치 보시며 내게는 무서운 표정으로 다그치셨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었다. 매번 비슷했던 그 상황 속에서 나의 행동에 대한 부모님의 반응에는 늘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가 기본적으로 깔려있었다.  그저 남들 눈을 신경 쓰고, 의식하고,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 당연하신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예의라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배우고 살았다. 그로 인해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늘 신경 쓰며 살았다.     



 그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내가 아이를 낳아 육아를 시작했다. 나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늘 남의 시선을 의식하던 나는 아이의 모습까지 두 배로 남을 더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옷도, 장난감도, 육아 용품들도, 심지어는 전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혹시나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해 보이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늘 좋은 것만 보고 같은 것들을 찾아다녔다.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처녀 때도 잘 안 다니던 백화점을 그렇게 다녔다. 크림 하나를 사도 백화점에서 사서 썼다. 아이 이유식은 무조건 한우였다. 한우가 좋아서가 아니라 비싸고, 남들 보기에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이 첫 돌쯤 전집을 들여놓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전집을 사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원해서, 아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아이이길 바랐던 마음이 컸다. 특히 첫째 아이 육아를 하면서 더 많이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이를 많이 야단쳤다.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늘 남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아이가 울면 정색하며 “울지 마. 뚝 그쳐.”라고 했고, 아이가 소리 지르거나 뛰기라도 하면 크게 화를 냈다. 아이의 옷에 작은 얼룩이라도 보이면 바로 벗겨 세탁을 했고, 아이의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하면 얼마나 열심히 닦아 줬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 눈에 더러운 아이로 보이는 게 너무도 싫었다. 그 탓에 지금도 아이들은 옷을 자주 벗어낸다. 4인 가족 세탁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아이라 옷이나 얼굴에 묻히면서 먹는 것은 당연한데, 아이니까 좀 더러워 보여도 괜찮을 텐데, 아이니까 소리 지르고 뛰는 것일 텐데...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일들을 왜 그리도 남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나는 그렇게 남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그 불편함에 화를 내기도 했고, 나를 더 힘들게 닦달하기도 했다. 늘 많은 일거리와 근심거리를 만들어 준 셈이다. 습관처럼 남을 의식했던 나는 남을 의식했기에 내 육아는 두 배로 더 힘들었다.     


 습관이 되어버린 남을 의식하는 버릇은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 첫째 아이가 농촌 유학을 가면서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이는 유학 센터에서 생활을 했다. 상황상 예전처럼 하루 종일 내가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볼 수 없으니 남을 생각해서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칠 필요도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주는 예의보다 유학센터 선생님들이 가르침과 그곳에서의 일상생활이 더 유익했을 것이다. 유학 센터에서는 아이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했다. 옷을 찾아 입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자기 방을 정리하는 것도, 씻는 것도, 심지어는 아이들 옷은 아이들이 직접 세탁기를 돌려서 널고, 마르면 개어서 자기 서랍에 넣었다. 물론 고학년 아이들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아이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씻고 싶을 때 씻고, 본인이 맘에 드는 코디를 하며 옷을 입고 다녔다. 이런 센터 생활에 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런 부분이 좋아서 아이를 더 보내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아이를 센터에 입소시키고 한 달쯤 지나서 학교 행사로 방문했을 때 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이의 옷차림이 놀라웠다. 내가 사준 비싼 메이커 옷들이 얼룩덜룩하고, 구멍도 나 있었다. 친정 아빠가 입학 선물로 사준 비싼 책가방은 방구석에서 천대받고 있었다. 며칠이나 안 씻은 건지 머리에서 냄새도 났다. 한숨이 나왔다. 내가 아이를 혼내자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냥 두세요. 아이들 좀 안 씻어도 괜찮습니다. 찝찝하다 생각되면 아이 스스로가 씻어요. 냄새 좀 나면 어때요? 우리 어릴 적엔 지금처럼 자주 씻고 다니지 않았어요. 엄마 떨어져서 아이들이 젤 하고 싶은 건 다름 아닌 안 씻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으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아이에게 비싼 옷 사서 보내지 마세요. 보시다시피 아이들은 학교에서 신나게 뛰어놉니다. 놀다 보면 바지에 구멍도 나고, 옷이 금세 해져요. 비싼 옷이든 싼 옷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아이가 편히 뛰어놀 수 있도록 싸고 편한 옷 보내주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아이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아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 질까’를 쓸데없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안 씻어도, 싼 옷이어도, 구멍 난 옷을 입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말이다. 아이가 편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며 아이를 키웠구나...’를 다시 한번 느꼈다.      


 일 년을 아이는 유학 센터에서 생활을 했고, 나는 아이를 멀리서 지켜보게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는 동안 아이에게 남을 의식하는 불편함에서 오는 잔소리를 하지 않게 되어서 참 좋았다. 아마 아이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 너무 좋았을 것이다. 아이의 농촌 유학을 계기로 아이에 대해 하나씩 내려놓기를 실행하는 중이다. 그렇게 남을 의식하는 불편함에서 하나씩 벗어나고 있다.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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