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 날, 천천히 하나씩
기내식
이렇게 쉴 새 없이 밥만 먹고, 잠자고, 화장실 가고,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붙어 있는 작은 화면만 바라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승무원들께서는 무한한 음식과 간식을 끊임없이 주셨다. 게다가, 메뉴도 정말 다양했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건지 맛도 있었다. 밥은 상상하는 그 맛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비행 중에 먹는 디저트는 상상 그 이상으로 달콤했다. 평소 잘 먹지도 않던 달다구리 한 간식들을 만나더니 고삐 풀려서 주는 대로 다 먹었던 거 같다.
그리고 양도 푸짐하다. 기내 테이블이 작은 것도 있었지만 메인 음식에 더해져 나오는 여러 반찬들과 후식으로 가득 찬 내 앞 작은 테이블을 보니, 잠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다소 버거웠지만, 잠시 나를 내려놓게 해주는 기내식 퍼레이드가 반갑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여행이니까'라는 한 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려고 내 뇌에서는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쳤는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부다페스트라는 스펠링이 눈에 보이자 안도감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경유하느라 지쳐있던 몸에서 에너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비행기에서 보낸 하루는 증발하고 맞이한 헝가리 첫날
분명히 한국에서 16일에 출발하고, 24시간을 하늘에서, 두바이에서, 다시 하늘에서 보내며 정직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헝가리에 도착한 날은 16일 대낮, 아직도 같은 지구에서 이렇게 서로 시간이 다르게 움직이는 점이 새롭고 재미있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가 시간을 돌리는 마법을 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게 마법처럼 다가오는 시차 적응은 아직까지 피곤한 감정보다는 재밌는 감정이 큰 거 같다. 그래서 첫날부터 나는 그동안 못 움직이고 있던 내 두 다리를 실컷 움직여주었다.
마지막 비행기에서 내린 후, 헝가리 입국 심사를 하려고 줄을 섰을 때 약간 놀라서 긴장한 티 안 내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요리조리 둘러봐도 동양인이라곤 나 한 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 여행하는 사람이 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없었다. 혼자 오지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 입국부터 승인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중간에 내 서류가 부족하다고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들이 계속 스쳐 지나갔다. 코시국에 여행을 가는 만큼 준비할 것도, 알고 가야 할 것도 정말 많다. 그래도 뭐, 이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할 말이 없다. 분명히 꼼꼼하게 날짜도 맞춰서 필요조건을 다 갖추었음에도, 불안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내심 내 서류들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기대했는지 자신감 있게 서류를 올려놓았는데 서류 날짜 확인은 물론, 제대로 봐주시지 않고 여권에 바로 도장을 찍어주셨다. '음,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걸까.' 찝찝한 감정 뒤로 하고 스크린 도어를 통과하니, 이제 진짜 헝가리 여행자 신분이 되었다.
천천히 그동안 국내에서 열심히 여행 다녔던 '여행 감'을 되새기면서,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하나씩 해내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표 끊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려서 숙소 가는 법, 체크인, 현금 인출하기, 저녁 먹기까지. 내 몸 절반만 한 캐리어 하나 끌고 다니면서 슬쩍슬쩍 부다페스트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낯선 곳에 왔다는 사실보다, 기계적으로 길을 잘 찾아 나서는 나의 모습에 더 낯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녁 시간이 지나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반짝반짝 빛나는 부다페스트 밤의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본 후로부터는 '나 진짜 여행하고 있구나.'를 깨달았다.
여행 첫날 저녁부터 열심히 구석구석 걸어 다니다 보니 금세 삼만보를 훌쩍 넘겼다. 매일 와야지 했던 국회의사당도 한 3번 왔나...? 그만큼 부다페스트의 매력은 수없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