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니버스 전성기 시절 애니메이션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성우를 꿈꾼 적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딱 한 번. 달빛천사를 보면서 가수가 되고 싶기보단 캐릭터가 되고 싶었던 수줍음이 많은 초등학생이었다. 그 시기를 제외하곤 유치원 선생님을 장래 희망으로 삼았다. 우선 아기를 좋아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을 좋아했다. 아주 짧은 시간 피아노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어린 동생들을 모아서 노래를 불러 주거나, 대화하는 걸 좋아했다. 여동생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칠판을 가져와서 공부를 가르쳐줬다. 공부를 잘하지도, 흥미를 느끼지도 않아서 학업 성취가 낮은 편이었지만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을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았고, 잘난 체도 할 수 있어서 그런지 상황 자체를 즐겼다. 고맙게도 동생들이 나를 좋아하고, 잘 따라줬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친구보단 어린 동생이 내 주변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래서 나는 유치원 선생님을 꿈꿨다.
또래 관계가 가장 큰 즐거움이자 스트레스이기도 했던 청소년기엔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이 많아졌다. 다수보다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선호하게 되면서 친구와 긴 시간 이야기 나누며 둘만의 비밀이 겹겹이 쌓였다. 목적을 갖고 나를 찾아 오는 친구가 생기면서 상담이 업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로만. 자세히 알아본 건 없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함과 동시에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거칠어서 학교생활 자체가 준비되지 않은 채 사회에 던져진 거 같았다. 이 와중에 진짜 사회생활을 한 거다. 책임을 주면 보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열심히 일했다. 성적과 급여가 반비례한다는 걸 알면서도 투자 대비 성과가 빠른 아르바이트에 더 몰두했다.
장래 희망은 품는 마음이 클수록 이루기 쉬운 줄 알았던 어린이 시절이 우습게도 성적으로, 성과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니. 본격적으로 직업인으로서의 상담가 과정을 알아보니 내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당장 마음 먹고 시작해도 늦었단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다. 원초적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고민을 들어주면서 보람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누군가한테 영향이 된다고 착각해서 우월감을 느꼈던 건지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뭐라도 해줄 수 있다는데서 기쁨을 느끼는 건지.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사회복지사를 마지막 장래 희망으로 정했다.
친한 친구와 관계가 제대로 틀어지면서 무엇 하나에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우울감이 몰려오고, 생활이 바뀌었다. 학교에 가는 게 싫고, 급식실에서 여러 학생과 밥을 먹는 상황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새벽에 등교하거나 점심이 지난 오후에 등교하기도 했다. 중2병도 무난하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생이 돼서 적응하지 못했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기도 했고, 우울로 인해 교실에선 대부분 잠을 잤다.
친구한테는 못 할 말을 가족한테 울분을 터트리는 일이 잦았다.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화도 냈지만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때라서 온 가족이 같이 힘들어했다. 분명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민을 들어주는 걸 좋아하던 나는 고민을 뱉어내는 과정을 무척 어려워했다.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 때마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도서를 찾아 읽었다. 위로가 됐다. 읽는 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단지 학교에 가면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밥도 잘 먹지 못했고, 잠만 잤다. 수업을 놓치는 일이 많아서 공부가 더 어려웠다. 그래도 숙제는 약속이니까 어떻게든 해 냈다. 기록하고, 모으는 걸 좋아하니까 수행평가만큼은 열심히 했다.
우연히 수업 시간을 비우고 교내 상담실에 가는 친구 얘기를 들었다. 문제가 해결되진 않지만,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교실에서 한 시간이나 자리를 비울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 내 행동을 보고 궁금해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더 이상 우울한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처음으로 상담실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