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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피아니스트, 그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풍경

arte 2024년 12월호

by 안일구 Feb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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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2024년 12월호

아직도 생생하다. 독일 유학 막바지이던 2015년. 기숙사 원룸. 자그마한 노트북 앞에서 마음을 졸이며 쇼팽콩쿠르 온라인 중계를 봤다. 배울 점이 많았다. 모든 연주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각자의 색깔로 쇼팽의 작품을 연주했다. 특히 조성진의 연주는 매 라운드 눈부셨다. 본선까지 모든 경연이 끝나자, 결과 발표 전에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와, 우승이다’

조성진. 이제는 이름만으로 전 세계의 클래식 애호가를 설레게 한다. 함께 음악을 만드는 동료나 지휘자 또한 조성진의 연주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조성진과 여러 번 함께 작업한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는 “조성진은 특별하다.”고 말한다.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11월 내한을 앞두고 마련한 인터뷰에서 조성진을 치켜세웠다. “조성진은 보기 드문 피아노의 시인이다.”


조성진이 지금 서 있는 땅

쇼팽, 드뷔시, 모차르트, 슈베르트, 리스트, 헨델까지. 이들 작곡가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과 함께한 정규 음반을 연이어 경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헨델의 작품에 대한 접근은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그의 협연 커리어는 이제 더 위로 갈 곳이 없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한 연주는 물론 올해 빈 필하모닉,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진행한 협연도 성공리에 마쳤다. 전 세계를 무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독주 리사이틀은 항상 수많은 음악 팬을 불러 모은다. 연주자와 함께 호흡하는 관객은 귀하다. 다른 공연장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공기 속에서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놀란 사건은 2021년 새로 발견된 모차르트의 작품(Allegro in D major, K 626b/16)을 초연한 것과, 2024/2025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Artist in Residence)로 선정된 것이다. 이제 그는 단순히 국내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연주자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는 그의 손끝을 주목한다.

https://youtu.be/vmxZVMU1Gpg?si=3jZFJKhuc846B7oG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

조성진은 TV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스스로를 ‘신생아’라고 표현했다. 콩쿠르 우승이 어떤 결과가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거장만 기억하지만, 사실 어린 나이에 주목받은 후 조용히 사라져간 피아니스트가 꽤 많다. 조성진이 이를 모르지 않을 터, 예술 세계, 더군다나 피아니스트의 세계에서, 걸어온 길보다는 가야 할 길이 멀고 그 길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쇼팽 콩쿠르가 끝난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었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 이후 인터뷰에서 "갑자기 걱정되고 무섭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부담과 무게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승 이후에 그는 여러 페스티벌 무대에 섰고, 최고의 성악가와 협연을 했다. 그 무게감을 동료들과 연주하며 덜어내는 한편, 함께 하는 연주를 통해 경험할 음악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들 조성진이 천재고 이미 완벽한 연주자라고 말하지만, 최근 연주를 보면 더 완벽하고 꼼꼼하게 준비한다는 생각이 든다. 연습과정에서 나오는 땀과 깊은 고민이 함께 느껴진다.

https://youtu.be/B8KsGLcGbC8?si=oVT4NjcuqBY3K_9y


조성진의 피아노

내가 느낀 것들을 나눌 수 있어 정말 기쁘다. 무엇보다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에게는 배우는 것이지, 평가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조성진의 연주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그의 연주 스타일을 논하는 이 글을 최대한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조성진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변화를 꾀할 테니.

연주자의 스타일을 알고자 할 때 쉽게 하는 실수가 있다. 다른 연주자와 지나치게 비교하는 것이다. 음악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특정한 인물이나 음반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이왕이면 작품과 연주자가 나눈 대화에 집중해 보고 싶다. 창작자가 남겨놓은 유일한 소통 창구인 악보를 어떻게 마주하고, 그것을 어떻게 소리로 꺼내는지 보는 것이다.


#1. 상상의 소리와 실제 소리

먼저 음색의 섬세함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조성진은 머릿속에서 상상한 음색의 기준과 완성도 자체가 아주 높다. 또한 그 소리가 실제로 발현되었을 때 상상한 소리와 일치율이 매우 높다. 음을 터치하기 전에 이미 음을 듣는 것이다. 많은 연주자가 이런 연습을 하지만 공연장에서 그대로 실현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발현된 소리는 설사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할지라도 많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소리가 된다. 그래서인지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소리와 음색만으로도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 바람이 부는 듯, 바위가 깨지는 듯, 폭풍이 몰려오듯, 여러 풍경이 쉽게 그려지게 만든다.

이 이야기가 다소 모호할 수 있어서 예시를 두 곡만 추천하고 싶다. 음반 <The Handel Project>의 마지막 트랙에는 헨델의 모음곡 중 빌헬름 켐프가 편곡한 미뉴에트가 자리하고 있다. 계속 비슷한 음형이 반복되는 곡인데, 조성진의 연주는 반복이 될 때마다 음색과 형태가 미묘하게 바뀐다. 아주 세밀한 공예처럼 이루어지는 연주라 듣는 즐거움이 크다. 그리고 드뷔시 음반 마지막 트랙인 '기쁨의 섬(L'isle Joyeuse, L.106)'을 들어보자. 너무나 다채롭고 섬세한 음색이 드뷔시의 음악을 에워싸고 있다.

#2. 투명한 해석과 유연함

음악은 특정 단어 없이도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지닌다. 따라서 모든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이며, 하나의 세상이다. 이 세상을 청중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바로 해석이다. 조성진은 아무런 편견 없이 작품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참고하기보다 악보 안에 담긴 세상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고, 가감 없이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음악 외적인 고민과 생각은 최대한 자제한다.

또한 나는 여러 차례의 실제 연주를 통해 조성진이 매우 유연한 연주자라고 생각해왔다. 완벽하게 준비하지만, 현장에서는 최대한 자유롭고 열린 상태로 연주하는 것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서 이틀 연속으로 슈만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두 차례의 연주가 뚜렷하게 달랐다. 심지어 지휘자의 요구에 따라 악상을 거꾸로 연주하는 경우도 발견했다. 통영에서 있었던 실내악 연주에서도 연주자들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유연하게 반응하는 모습이었다. 공연장에서는 언제나 유연한 조성진을 만나게 된다.그의 투명한 해석과 유연함이 빛나는 음반도 추천하고 싶다. 우선 모차르트 음반에 담긴 소나타를 들어보자. 모차르트 안에 담겨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모두 꺼내서 눈앞에서 그려지게 해준다. 왼손과 오른손이 만들어내는 음형들은 오페라 속의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마티아스 괴르네와 함께 한 음반 <Im Abendrot>는 조성진의 유연함을 느껴볼 수 있는 명반이다. 수직적으로 폭이 아주 넓은 목소리와 진한 루바토를 가진 괴르네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는 따뜻한 바람처럼 부드럽다.

#3. 뜨거움과 차가움의 균형

음악에 공감하고 노래하는 뜨거운 가슴, 난도 높은 기교와 음을 컨트롤하는 차가운 머리. 어느 한쪽이라도 부족하면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 이 사실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양쪽의 균형을 완벽하게 잡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조성진은 어느쪽으로도 치우쳐있지 않다. 감정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뜨겁게 연주한다. 음악이 가진 감정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설레게, 애절하게, 고통스럽게, 찬란하게 연주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에 따른 기교적 어려움도 완벽하게 컨트롤한다. 이 지점이 참 놀랍다. 한없이 노래하면서 무섭도록 차분하다.

최근에 빈 필하모닉과 진행한 협연에서 이런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조성진이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대화하고 충돌하는 부분에서 마치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았다. 조성진은 이 음악을 묵직하고 뜨겁게 연주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냉철한 감각으로 어려운 패시지들을 차분하게 컨트롤했다.


#4. 라벨, 브람스 그리고 슈만

다른 악기와 비교해 방대한 레퍼토리를 지닌 덕분에, 피아니스트는 거의 무한한 선택지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장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평생 연주 활동을 하더라도 모든 곡을 소화할 수는 없다. 이제 서른을 넘긴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러한 레퍼토리를 선택하는 데 매우 스마트한 연주자다. 그는 시기와 상황에 맞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잘 소화할 수 있는 곡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뿐 아니라 협연과 리사이틀 무대에서 시대를 가리지 막론하고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높은 수준의 연주로 펼쳐 보인다.

조성진의 다음 음반은 라벨 작품으로 채워진다. 라벨은 피아니스트들에게 단순한 작곡가가 아니라, 피아노라는 악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하는 음악적 혁신가다. 조성진은 라벨의 독특한 음악 세계와 섬세한 색채를 탁월한 테크닉으로 표현해, 라벨 음악의 정수를 청중에게 전해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서른의 조성진은 앞으로 브람스의 작품을 더 많이 연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최근 10월과 11월 연주에서 들려준 그의 연주는 더욱 깊은 음색과 무게감을 보여주었으며, 앞으로 그의 브람스 연주도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조성진의 슈만 연주를 더 자주 음반과 무대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의 연주는 슈만의 작품과 특히 잘 어울린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피아노 협주곡과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들려준 '환상 소곡집 작품번호 12'의 연주는 이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 영상이 되었다. 슈만의 음악에 담긴 복잡하고 뒤얽힌 감정을 조성진의 연주로 더 자주 만나고 싶다.

https://youtu.be/yOanowGonN4?si=iQqk8fdImMeBxxCX


조성진은 피아니스트로서, 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것을 경이로운 방식으로 실현해내는 연주자다. 스스로 무대 위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의 연주는 단순히 기술적인 완벽함을 넘어, 음악이 가진 깊이와 감정을 온전히 담아낸다. 그가 연주하는 순간, 우리는 음표 너머의 풍경을 보고, 음악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며,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변화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조성진이 앞으로 어떤 음악의 바다를 항해할지, 그 끝에 펼쳐질 새로운 풍경이 기대된다.


글 안일구


(2024년 11월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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