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땡볕, 정문까지 걸어 나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분명 열심히 걷고 있는데도 속도가 많이 느려져서인지 한참 시간이 걸린다. 안 그래도 큰 사업장에서 정문까지 걸어 나가려니 더 멀게 느껴진다. 날씨는 또 왜 이리 더운지 생전 안 나던 땀이 얼굴에서 떨어질 때 반대편에서 아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니, 힘내! 잘 가" 얼굴을 확인한 뒤 손을 같이 흔들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점심시간에 나 혼자 퇴근하려니 기분은 좋네. 오늘은 산부인과 검진이 있어 빨리 퇴근하는 날이다. 이제 출산 예정일까지 2개월 정도 남았으니 걷는 게 힘들어질 만도 하다. 뒤뚱뒤뚱 오리가 따로 없네. 예전에 선배가 임신했을 때는 왜 배를 내밀고 팔자로 느릿느릿 걸을까 했었는데 내가 딱 그렇다. 끝없이 나오는 배 때문에 배를 안 내밀고 싶어도 다리를 오므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퇴근하러 걸어 나가는 길이 기분은 좋은데 몸은 무거워 영 속도가 안 난다.
https://pin.it/4SHX2yk
오후 네 시만 되면 힘이 든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서 허리도 엉덩이도 그 아래 부분까지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피곤하다. 5분만 누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모성보호실에 가서 쉬고 싶은데, 그러면 쉬는 시간만큼 근무 시간을 제외해야 해서, 퇴근 시간이 더 늦어진다. 꾸역꾸역 참으며 버틴다. 동료들이 얼굴이 하얘졌다고 한다. 이 시간만 되면 핏기 하나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동동 떠다닌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어서 아이를 낳아서 몸이 홀가분해지면 좋겠는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 거라고들 말한다. 지금도 힘든데 그때는 얼마나 힘든 것일까?
엄마한테 문자가 왔다. 몸은 괜찮냐며 근무는 잘했냐며 귀찮고 힘들어도 저녁 먹고 들어가라는 연락이다. 귀신같은 엄마. 회사에서 저녁을 제공해 주지만 먹기가 싫어서 거의 집으로 바로 퇴근한다. 집에 도착하면 먹을 게 없어 다시 난감해지기는 하지만 아침, 점심을 회사에서 먹기 때문에 저녁까지는 회사에서 먹고 싶지 않다. 임신 전에는 동료들이랑 이것저것 저녁 먹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임신 후에는 바로 집으로 퇴근한다. 몸이 힘들어져서 근무 시간도 가까스로 채우는 중이라, 퇴근 후에는 도저히 돌아다닐 체력이 남아 있지 않다. 집에 가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저녁까지 회사에서 먹으며 온종일 회사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지 않다고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배 부른 소리라고 뭐라 하셨다. "네가 얼마나 호강을 누리는 줄 아니, 남이 해 주는 밥이 얼마나 감사한 건데, 찍소리 하지 말고 먹고 들어가. 애 낳으면 네가 다 해 먹여야 한다. 지금은 널 위해서 먹는 게 아니니 일단 먹고 집에 가." 한 바탕 잔소리를 들은 후에 퇴근길 식당에 들렀다. 이 때는 몰랐지. 회사에 돌아가고 싶은 제일 첫 번째 이유가 남이 해주는 회사 밥 먹고 싶어서가 될 줄은.
필요한 짐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정리했고, 정리해 놓은 서류와 다이어리 등은 동료에게 맡겼다. 오늘은 컴퓨터를 반납하고 사원증을 반납하면 된다. 이제 퇴근하면 당분간 출근을 안 해도 된다. 아싸. 다들 왜 이렇게 빨리 출산 휴가를 쓰냐고 첫째는 예정일보다 늦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더 출근하다가 휴가를 써도 된다고 한다. 예정일 3주 남고 출산 휴가를 쓰는데 빨리 들어가는 거라고? 100일로 정해진 출산 휴가를 최대한 예정일과 가깝게 쓰면 아이 낳고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요새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얼마나 쉴 거예요? 육아 휴직 쓸 거예요?" "네, 아기 봐줄 사람이 육아휴직 쓰려고요." 주위를 둘러보면 놀랍게도 출산 휴가 100일만 쓰고 출근하는 선배맘들도 많았다. "아기는요?" "친정 엄마가 봐주셔요." 요새는 불과 2년 전과 또 다른 분위기다. 최근 임신한 동료들이 육아 휴직을 많이 써서 다행이다. 나는 육아 휴직 1년을 모두 사용할 계획이라 총 1년 3개월 휴직 예정이다. 다른 계열사는 요새 사업 분위기가 안 좋아서 휴직 기간을 2년으로 늘려줬던데 이곳은 어림도 없는 분위기다. 인력이 모자라서 난리이니. 정해진 휴직 기간을 모두 사용한 뒤, 1년 3개월 후면 아이는 나와 떨어질 수 있을까? 나는 회사로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출근할 수 있겠지? 동료들의 배웅을 받고, 사원증을 반납하고 나가는 길 몸은 원래 무거웠는데 마음도 살짝 무겁다.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