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안 했으면 어떻게 아이들과 이 상황을 버텼을까. 퇴사 후 코로나가 심해져서 유치원, 어린이 집의 휴원이 많았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씩, 그 긴 날들을 아이들과 간혹 산책만 하면서 대부분 집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이 없어서 그냥저냥 시간이 흐른 것일 수도 있다. 퇴사 후의 우울감과 상실감, 허전함 따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코로나가 1년 정도 지나고 모든 사람이 짧게 끝날 상황이 아니라고 인식될 쯔음, 둘째의 두 돌이 지나갔다.
아이가 두 돌, 30개월 정도 지나니 놀이터에서 더 이상 일일이 좇아 다니지 않아도 되는 정도로 자랐다. 첫째와 우애 깊게 노는 모습을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그리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드디어 의자에 앉아서 쉴 수가 있구나, 숨 좀 돌릴 수 있구나 한껏 기쁘기까지 했다. 이제 내가 시소 옆에서 대기를 하지 않아도 둘째는 떨어지거나 다치지 않는다. 첫째와 시소를 타기에 시소에서 해방되었다. 미끄럼틀에서 다치지 않을까, 봉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을까,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을 수 있다. 조금이나마 자유를 찾은 것 같다.
매일 놀이터에 오니 마치 출근 도장을 찍는 기분이다. 아이들은 쪼르륵 미끄럼틀로 올라간다. 이제 둘이 노느라 엄마를 찾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자유 시간을 맞아 핸드폰을 꺼내 sns 세상을 구경한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일상, 자랑, 광고, 홍보. 한참을 쳐다보다가 아는 지인의 sns에는 우스갯소리의 댓글도 달아보니 이내 시간이 훅 지나간다. 다음 날은 옆 아파트의 놀이터에 왔다. 첫째 친구가 있다. 아이들끼리 신나게 놀이가 시작되고 나는 오랜만에 보는 첫째 친구 엄마와 수다를 시작한다. 아이의 걱정거리를 주고받고 동네 정보를 주워듣고, 주말에 뭐 할지 수다 떨다 보면 시간이 잘 지나간다. 다음 날도 놀이터에 간다. 역시 아이들은 놀이터 기구로 뛰어 나갔고 나 혼자 남겨졌다. 오늘은 훌쩍 자란 아이의 옷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다. 아이 옷 사고, 무슨 음식을 해 먹을지 검색해 보고, 재료를 주문하고 이것저것 찾다 보니 집에 갈 시간이다.
오늘은 놀이터 말고 공원으로 왔다. 매일 놀이터에 가니 나는 운동도 안 되고 재미가 없다.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것 같아서 함께 산책이라도 하려고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에 마련된 운동 기구를 발견하더니 아이들은 신나서 달려갔다. 어른 흉내를 내 보며 운동 기구에 올라 서 몸을 움직여본다. 이것조차 재미있어하는 아이들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다. 킥보드를 타며 공원을 씽씽 달리는 아이들을 보자니, 순간 멍해진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햇볕 좋은 선선한 늦은 오후라 그런지, 아이들이 나를 전혀 안 찾아서 그런지, 갑자기 불현듯 눈물이 흐른다. 똑똑 흐르던 눈물의 양이 점점 많아져서 서러워 소리까지 새어 나온다. 얼굴이 새빨개진다. 우리 아이들 뿐 아니라, 다른 아이도 있고 다른 어른도 있는 이 개방적인 곳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은 아줌마가 청승맞게 새오 나오는 소리를 애써 감추며 울고 있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애들 노는 것만 바라보며 시간 죽이기를 하면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이러려고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고, 회사를 그렇게 열심히 다닌 걸까? 이러려고..? 지금 나는.. 뭐 하고 있는 걸까?
코로나가 심해 휴원했을 때는 아이들이 원에만 가도 좋겠다는 염원이었다. 놀이터에서 아이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쫓아다녀야 할 때는 의자에 앉아 수다 떠는 엄마들이 부러웠다. 아이가 커서 얼른 나도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누리게 되자, 마음속 여유를 찾게 되자, 안 보이던 내가 보인다.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