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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하 Dec 20. 2024

10화_아이언맨을 좇아

몸속 아가와 몸 밖의 아이

“선배님 오후 4시네요.”

“어? 무슨 말이야?”

“선배님 얼굴이 또 새하얘졌어요. 오후 4시예요.”

“정말? 설마?”

핸드폰을 들어 어두운 액정을 보니 창백해진 실루엣이 비친다. 이윽고 화면을 눌러 3:50 시간을 확인하며 배시시 웃는다.

“정말 4시 다 되었네. 우리 후배 용하다.”

“진짜 신기하네요. 어떻게 아침엔 그렇게 팔팔하시다가 오후 4시쯤만 되면 이렇게 사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할 수 있죠?”

“힘들어서 그래. 몸이 버티는 데 한계가 온 거지. 눕고 싶다, 아아아~”

출근 준비부터 시작해 이미 9시간 동안 회사에서 근무했으니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나날이 존재를 드러내는 배 속 별이로 하복부가 단단하게 조여든다. 허리도 슬슬 아파온다. 5분만 누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회사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임산부와 수유하는 워킹맘들을 위한 모성휴게실이 있지만 들어가는 순간 근무 시간에서 머문 시간만큼 제외해야 한다. 근무 시간을 맞추려면 퇴근이 늦어지고 집에서 엄마만 기다리고 있는 우리 아이는 어쩌나, 휴.. 허리를 잡으며 자세를 고쳐 다시 앉아 본다. 

“어서 집 가셔야겠네요.”

“집 간다고 누울 수 있다고 누가 그래?ㅋㅋ 너네 집에 좀 가자.”

“앗 그렇네요. 애기 얼집 갔다가 집에 와서 선배님만 기다리고 있겠네요.”

“그러게 배 속 아기도 있고 얼집 다니는 애기도 있고, 내가 인기가 많네.”

“남편 분도 계시잖아용~”

“…. 그래. 일 해라.”

“잘못했어요 선배님. 아이언맨 선배님. 한 번만 봐주세요.”

“웬 아이언맨?”

“선배님 심장이 두 개인 거잖아요. 배 속 아기랑 선배님이랑.”

“그런가? 가끔 화가 나거나 마음이 불안정해지면 심박동이 굉장히 빨라지는데 이게 누구 것인지 헷갈리긴 하지.”

“진짜 신기하네요. 그렇게 화날 일이 있었어요? 임신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 같아요. 육아하면서 임신까지 선배님 진짜 대단해 보여요.”

“흠.. 나도 전혀 몰랐던 세계야. 내가 임신에 육아에 다시 임신을 하게 될 줄이야. 몸속 아기를 키우면서 몸 밖의 아이도 키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냥 닥치니깐 하는 거야. 너도 언젠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고 그나저나 알콩달콩 신혼 생활은 좋아?”

“지금은 좋죠, 호호. 저녁에 누구랑 어디서 놀까 고민 안 해도 되고 주말에는 신랑이랑 같이 늦잠 자고 일어나서 느지막이 맛있는 거 먹으러 데이트 나가고 좋아요. 그래서 임신이 고민돼요. 지금은 아니고 더 있다가 갖을까 생각하는데 그때 가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요.”

“그래, 일단 지금을 즐기면 되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그래도 될까요? 여자가 나이 들면 아이 갖기 어렵다는 말도 많으니깐 걱정은 되고, 모르겠어요.”

“100세 시대인데 나이는 무슨. 일단 지금 신혼을 즐겨.”

“푸하하, 네 아이언맨 선배님. 간식 좀 사 드릴까요? 뱃속 아기와 선배님 기운 내서 퇴근하셔야 하잖아요.”

“오 웬일?”

“선배님이 그동안 항상 사 주셨으니 이럴 때 보답해야죠.”

“감동이다, 고마워, 후배님. 나 요거 메일 하나만 확인하고 내려가도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다 되면 말씀해 주세요.”


후배와 대화 중 도착한 이메일을 확인하하며 화면 창을 연달아 열었다. 고과 결재 통보 메일이 왔다. 파트장님으로부터 하위 고과 통보를 들은 이후 꽤나 바빴다. 고과 산정 기준에 대해 알아보고 지난 업무 기간 동안 해 온 업적을 정리하여 메일을 보내고 파트장, 팀장 면담에 인사과 면담까지 투쟁과 쟁취의 시간들이었다. 고과 평가 기간에 임신으로 병가를 낸 시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좋은 방패막이었다. 임신 전 팀장이 사업 부 과제 시상 후보로 나를 올린 것이 최근 발표가 났는데 시상을 받게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평가 기간 업적이 인정되어 하위 고과가 아닌 평균 고과로 어렵게 변경 가능했다. 임신을 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상위 고과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앞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남자 동기가 갑자기 부러워 보였다. 


“넌 회사도 계속 다니고 감사한 줄 알아. 와이프한테 더없이 고마워해, 임마.”

“갑자기 뭐래?”

“됐다,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아. 후배님 우리 간식 먹으러 갈까요?”

아무 죄 없는 앞자리 동기를 째려보고는 옆 자리 후배에게 말을 건넸다. 상사한테 업무적으로 받는 인정도 좋지만 후배한테 받는 존경과 위로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잘 살고 있구나,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구나를 알 수 있는 이정표 같은 느낌. 내 간식 사면서 초코송이 좋아하는 우리 애기 간식도 사 달라고 졸라봐야지. 아이언맨은 인류를 구해야 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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