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아무리 내리쳐도 시멘트벽에서는 못이 튕겨 나간다. 몇 번이고 손을 때리고 나서 못 박기를 멈춘다. 처음에는 말랑했던 시멘트지만
한번 굳어지면 못을 박을수가 없다.
아이에게 쏟아붓는 잔소리와 닮았다. 사춘기를 지낸 아이에게 엄마의 소망을 각인시키려다 손가락만 다친다.
지금껏 대화방식 속에 양육 패턴을 떠올려보면 걱정이 많았다는 사실 하나가 떠오른다. 미리 걱정하고 아이보다 먼저 저만치 가 있던 때, 혼자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받아들였다는 건 마음에 새기지 말았어야 할 좋지 않은 습관인 것이다.
아이도 나도 말랑했던 유아기와 젊은 시절
'어떻게'와 ''무엇을'에 집착했더니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시멘트를 가득 욱여넣은 스크레이퍼로 밀어붙이듯
방법만이 답인 줄 알고 한 방향으로 밀어부쳤다.
흙손으로 요리조리 다듬어야 정교하고 조각처럼 모양을 낼수 있었을텐데.
사춘기를 지낸 아이에게 뒤늦게 흙손을 들이대봐야
모양을 바꿀수가 없다.
엄마의 잔소리라는 소재로 글을 쓰다가 문득 들어온 감각들을 적어가자니, 내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길 위에서 모양새를 다듬어가며 단단하게 굳혀도 될만한 - 잔소리를 덜고 남을만한 말이 드나드는- 마음과 말을 가져야할 보이지 않는 공간이 생긴 것 같아 절묘하다.
멈춘 줄 알았던 감수성 세포가 깨어나 뚫다만 깊이의 사유로 내려가 감을 잡아본다. 이성과 감성의 '글의 장'이 아직은 말랑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