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서 '수학'이 필수일 리는 없다. 대학교 경제학 수업에서 미적분은 꼭 필요한 수학 도구이지만, 미적분을 알아야만 경제 돌아가는 상황을 더욱 잘 통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리(物理:physis)의 관점에서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슈뢰딩거 파동방정식,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 등을 수학식으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근원이 실제로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사실 누구나 실제로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물리학의 바탕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에 그것을 연구하고 상상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수학이라는 도구를 필요로 할 뿐이다.
수학 없이도 물리의 관점에서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의 책들을 읽다 보면 알 수도 있다.([첫 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 [모든 순간의 물리학] / [보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만약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등) 물리학자 김상욱 박사의 저서 [떨림과 울림], 과학 저널리스트 폴 센의 [아인슈타인의 냉장고]도 같은 맥락에서 추천할 만한 책이다.
'썸앤파커스 출판사'를 통해서 번역 출판된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처럼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도 그의 연구 주제이자 성과인 '루프양자중력 이론'을 설명하는 책이다. 친절한 카를로 로벨리 박사는 언제나 그렇듯, 2700년이 넘는 긴 물리학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엮어가면서 '루프양자중력'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의 내용이 카를로 로벨리의 이전 책들과는 다른 면도 많은데, 그중 하나가 루프양자중력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켜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의 삶의 중요한 장면들을 자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도식을 그릴 필요가 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는 연속적인 변수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여겨지는, 시공간 알갱이의 확률운에 기반을 두고 있는 어떤 세계를 상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발견한 해결되지 않은 기이한 문제이다.
나는 친구들과 학생운동에 대한 책(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베로나 경찰에 끌려가 구타당하며 "공산주의자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을 쓰면서도 당시 시공간과 관련해 제시되었던 여러 시나리오들을 해석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점점 이 주제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45페이지)
이전 저작들에 비해 눈에 띄게 다른 면 또 하나는 과학자나 독자들에게 과학이 필요한 이유와 과학을 연구, 또는 공부하는 관점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짐작하고 있는 내용을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미 확립되어 각 분야에서 완벽하게 적용되고 있는 극소수의 기초 이론들의 내용뿐이다. 물론 확립된 이론과 사변적 이론 사이에 흐릿하게 그어져 있는 경계선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경계선이 없어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194,195 페이지)
... '모든 과학자는 각자의 아이디어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나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열정을 담아 전력을 다해 자신의 가설을 주장해야 한다. 활발한 토론이야말로 지식을 추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장이 결코 눈을 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틀릴 수 있다. 그것을 판가름해주는 것은 숫자도 논리도 아닌, 실험뿐이다.'... '대중은 과학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어떤 현상을 '이해했다'거나 '설명되었다'라고 말하기 전에 신중해야 한다.'... (196, 197 페이지)
... '과학과 민주주의는 동일한 시대에, 동일한 지역에서 탄생한 만큼 분명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고 다른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라는 볼테르의 말은 민주주의의 핵심이 동시에 과학적 방식의 핵심이기도 하다.'... '과학적인 이해에 열린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결국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사고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가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항으로 가득했던 나의 젊은 시절은 결국 언제나 전복적인 과학적 사고라는 피난처를 찾았던 셈이다.'...(207, 208 페이지)
위 문단에서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는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은 기원전 7세기 그리스 문명이다. 아테네의 도덕철학(nomos)이 그리스 철학의 주류가 되기 전에, 밀레토스에서 시작된 자연철학(physis)의 시대가 카를로 로벨리가 말하는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 곳'이다.
책의 제목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인데, 읽고 보니 이런 제목도 어울릴 것 같다. '루프양자중력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과학, 철학, 역사와 인간에 대한 에세이'.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더 궁금하다면 카를로 로벨리의 다른 책들, 그중에서도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를 차분하게 읽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