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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환 Apr 19. 2022

과학 VS 철학_Ft. 제논의 역설

'제논의 역설'에 대한 두 개의 반증


... 두 번째 역설은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이에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가 걸음이 느리잖아요. 불쌍한 거북이를 배려해서 아킬레우스보다 몇 걸음 앞에서 출발하게 해 주면, 아킬레우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지요.


이 논증은 위의 그림에서 아킬레우스가 A 지점에서 출발하고, 거북이가 B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합니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으려면 일단 B 지점에 와야 하는데, 그때 거북이는 앞으로 조금 나가서 C 지점에 있게 돼요. 이어서 아킬레우스가 C 지점에 도착하면 거북이는 다시 D 지점에 도달하죠. 

이런 식으로 아킬레우스가 도착해야 하는 점들이 무한히 많이 생기는데, 유한한 시간 동안 무한개의 작업을 완수할 수 없으므로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 시간을 수학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아킬레우스가 각 지점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있고, 그 합 역시 일정한 값에 수렴합니다. 그래서 제논 주장과 달리 현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게 되죠.

 - [철학사 수업_1. 고대 그리스 철학] (김주연 지음. 사색의숲 2021) 가운데 180~181 페이지




... 거북이를 따라잡으려면 아킬레스가 10미터를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일정한 시간이 걸리겠지요. 이 시간 동안 거북이는 몇 센티미터를 나아갔을 겁니다. 이제 그 몇 센티미터를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스는 시간을 더 들여야 할 텐데, 그동안 거북이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으려면 그런 일이 무한한 횟수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한한 횟수는 무한한 양의 시간이라고 제논은 논증합니다.

...  솔직히 말해 이 논증은 거의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디에 오류가 있는 걸까요? 한 가지 가능한 답은, 어떤 것을 무한한 수로 모으면 마침내 무한한 것이 된다는 생각이 참이 아니기 때문에 제논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끈 조각 하나를 반으로 자르고 그 반을 또 반으로 자르고 이렇게 무한히 반복해봅시다. 마지막에는 무한한 수의 작은 끈이 남겠죠. 하지만 이것들을 다 합쳐도 유한한 길이가 될 겁니다. 애초의 끈 조각 길이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무한한 수의 끈 조각을 붙여도 유한한 길이의 끈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무한한 수의 시간들을 더해도 유한한 길이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죠.

-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 썸앤파커스 2018) 가운데 30~31 페이지



철학사가 주제인 [철학사 수업]과 루프양자중력이론이 주제인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가 '제논의 역설'을 다루는 이유는 각각 다르다. 하지만 위에 소개한 두 개의 이야기 모두 '제논의 역설'의 오류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명확한 차이가 있다. [철학사 수업]은 거리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은 유한하다는 전제가 있고,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는 '무한한 수의 나눔=무한한 수의 시간'인데 다만, 무한의 합은 무한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다.  혹은 '수렴'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 [철학사 수업]의 논증을 거리를 무한하게 쪼갤 수 있는 것처럼 그에 대응하는 무한히 쪼갠 시간도 있는 것인데, 시간이 수렴하기에 거리도 유한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논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제논의 역설 중 '이분법의 역설' 참조) 그렇다면, 즉 '무한도 수렴한다'는 논리로 '제논의 역설'을 논파하고자 한다면 굳이 시간 변수를 꺼내들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여간에 [철학사 수업]의 논증도 무한의 합이 유한일 수 있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만, 둘 간에 미묘하고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나는 둘 중 무엇이 더 옳은가를 논하는 것보다(물론 이 또한 중요하지만), '제논의 역설'에 대한 두 이야기는 매우 부분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철학과 과학은 결국 '같은' 일을 하는 '다른' 학문이라는 점을 이 사례를 통해서 더 강조하고 싶다.


철학사는 지식의 역사다.


김주연 박사의 [철학사 수업_1. 고대 그리스 철학]은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등 자연(만물)의 근원을 물리(physis)의 관점에서 연구했던 밀레토스 출신 철학자들을 고대 그리스 철학의 출발점으로 소개한다. 당대에 각각의 일파에게 스승으로 존경받으며 저술도 남겼던 지식인들이며, 그리스 로마 문명뿐만 아니라 산업혁명 이전까지, 철학사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헤겔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이다. 물론 밀레토스 학파보다 좀 더 뒤에 등장하며 저술도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그리스 철학사의 가장 큰 주역이기는 하지만 밀레토스 학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의 계보에 있다.


헤겔까지의 철학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독일 태생의 헤겔이 활동했던 시기보다 이전의 일이지만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의미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대학교에서 서양철학사나 정치학을 공부할 때도, 그 맥이 강조된다. 칼 마르크스, 버트런드 러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루이 알튀세르 등 헤겔 이후의 서양철학은 당대의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특징과 (자연, 실험, 응용, 이론) 과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발전을 반영하며 분화됐다.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은 지식의 역사다. 밀레토스 학파를 출발점으로 했을 때 알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철학자들이 오늘날의 자연과학자, 이론과학자들의 태도와 동일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학문을 다뤘다는 점이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니, 불이니, 원자이니를 논했던 태도는 오늘날 이론물리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을 규명하고자 하는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피타고라스도 수학의 특징을 자연의 본질과 등치 시키며 그만의 신비주의를 탄생시켰다. 다만 당대의 과학적 수단의 발전 정도가 낮고, 축적된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지식의 많은 부분이 철학자들의 머릿속에서 형이상학적으로 구성됐으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과학적 탐구자의 태도가 퇴색하고 덕성(nomos)이 더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자연/만물의 본질, 사람들이 인식하고 해석(doxa)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과 세계의 본질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의 태도가 여전했다는 것도 그들의 저서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하늘을 본 플라톤과 달리 고개를 숙여 사람과 땅을 보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과학자의 면모를 잘 볼 수 있다.


당연하게도 자연과 만물의 현상 속에서 근원, 본질을 탐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차이점을 가질 수 없다. 이 세상이 태초부터 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를 각각 별도로 갖춘 채 탄생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신화는 별도다. 신학에 기반을 둔 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 절대적 신의 존재를 믿었던 과학자 아이작 뉴턴 등 매우 영향력 있는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암흑시대로까지 치부되는 중세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며, 철학과 과학은 신화로부터 반정립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자연과 만물의 본질을 탐구했다. 


다만, 철학의 중심이 밀레토스에서 아테네로 옮겨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과학과 철학, 철학과 과학은 우리가 역사 속 철학자와 과학자를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역사, 학문의 계보를 가지고 발전해왔다. 


'physis'에서 'physics'로


앞서 소개한, 제논의 역설이 가지는 모순에 대한 두 개의 설명 중 카를로 로벨리의 설명이 옳다고 논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적용하면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지 않으며 빛의 속도를 상수로 놓고 봤을 때, 무한한 공간에서는 시간도 무한하고 유한한 공간에서는 시간도 그만큼 유한하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사 수업]을 읽으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서양철학이 오늘날 설 자리는 어디 있는가라는 오래된 생각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미천한 수준인 밀레토스에서 고대의 지식인이었던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과 자연현상을 설명했지만, 오늘날에는 과학이 철학과 달리 훨씬 더 면밀하게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또한 첨단의 과학기술을 동원해 이와 같은 일을 대부분 처리하기 때문에 철학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만물의 근원에 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한정되지 않는 것. 원자, 양자로도 번역 가능)은 당대 밀레토스의 자연과학 발전 정도에 비추어 매우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줬고, 오늘날의 양자물리학, 이론물리학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세상 만물의 근원으로 다루었던 아페이론의 핵심 내용을 유럽 입자물리연구소 강입자가속기를 통해 실험으로 검증하고 있다. 이 방법 말고 어떤 다른 철학적 방법으로 아페이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을까? 또, 대략 145억 년 전에 빅뱅이 있었으며 빅뱅 이후 많은 입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주 천체를 구성하고 그 입자들의 조형물인 무기물로부터 유기물, 즉 생명이 탄생했다는 과학의 논리 앞에서 플라톤의 진리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우주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의 과학, 그중에서도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구성되는 이론물리학, 우주의 가속 팽창과 빅뱅 이론 등의 우주론이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이어져 온 서양철학의 계보를 흡수해 학문적 통일을 이루는 방식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과학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에서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으로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하는데, 철학이 이를 가능케 하는 과학의 샘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과학과 철학은 처음부터 한 몸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가.


인류 지식의 역사를 공부하고자 할 때, 철학사 공부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주연 박사의 [철학사 수업]은 쉽고, 유쾌하며 한참 전에 내가 읽었던 철학사 책들보다 더 폭넓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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