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목표란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
지금은 고인이 된 '변희수 하사'가 강제 전역을 당하고,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그로 인해 불거졌던 때 읽은 책 [탄생의 과학](최영은 작가. 웅진지식하우스 2019)의 서평입니다. 그 당시에 신간 코너를 두리번거리다가 제목에 이끌려 골라 읽었습니다. 과학 서적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쉽게 빠져들 만한 책입니다.
인류 역사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편견은 무지와 결합된 아집으로부터 비롯하며, 그로 인해 폭력이 발생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절감했습니다. 반인권 문제보다 자기 존재의 망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과학에 대한 무지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과학자들은 성이 결정되고 생식기가 완전하게 발달한 성체도 'Foxl2'(난소의 발달과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여성 결정 유전자)의 기능을 필요로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성장한 암컷 쥐에서 이 유전자를 지워버리는 실험을 합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난소 세포가 고환(정소) 세포로 변합니다. 놀란 과학자들은 혹시 여성 결정 유전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반대되는 실험을 해보기로 합니다. 이번에는 이미 자란 수컷 쥐에서 남성 결정 유전자 중 하나를 지웠습니다. 그랬더니 고환 세포가 난소 세포로 변하고, 수컷 쥐에서 여성 호르몬 중 하나인 에스트로겐이 분비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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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를 향한 날 서린 시선은 '정상'이 아니라는 편견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성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순간 스위치를 켠 것처럼 단번에 정해지고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때, 과연 '비정상'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우리의 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들이 평생 노력한다는 위의 연구는 성의 정의, 성의 유동성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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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우리 몸은 선택된 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성별에 따라 생식기 구조와 호르몬 수치가 정해진 이후에도 내 안의 다른 성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최영은 저. [탄생의 과학] 3강 '학교에서 배우다 만 유전자' 중에서. 78~79페이지)
남성 군인으로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하고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기를 희망했던 변희수 하사에 대해서 육군은 '성기 상실에 대한 심신 장애'를 이유로 강제 전역을 결정(2019년)했다. 같은 해에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숙명여대 입시에 합격한 A 씨에 대해서 숙명여대 재학생을 포함한 일부 여대생들이 "여대는 남자가 여자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학을 반대하는 일도 있었다. 인간도 '성'을 변경/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실험으로 검증하는 시대에도 우리는 아직 '성의 선택은 곧 장애', "한 번 남자는 평생 남자, 한 번 여자는 평생 여자'라는 미신을 따르는 사회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과 성전환을 인정하지 않은 일부 여대생들의 주장은 곧 주술일 뿐이라는 것을 '탄생의 과학'이 논증하고 있다. 저자 최영은 교수(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생물학과)는 [탄생의 과학]에서 "과학의 목표란 '점진적으로 편견을 없애는 것' 이라던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1강 '1등 정자의 진실')라고 했는데 21세기에 주술적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은 나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탄생의 과학]은 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실은 학교에서 사실과 다른 지식을 꽤 많이 배우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우는 책이다. 내가 보기엔 우리 모두가 우리 시대의 문명에 대해서 좀 더 겸손한 태도를 취하고 과학에 관심을 보이고 참여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학교에서 'XY' 염색체는 남성이고 'XX' 염색체는 여성이라고 배웠는데 과학자들이 관찰과 실험으로 검증한 바에 따르면 이 또한 반증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여전히 무지하기 때문에 주술과 편견을 대물림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아이들은 과학이 이룬 성과를 배우고, 존중하며 지금보다 진화된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길 바라기에 [탄생의 과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교과서에 실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