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다. 사전적 정의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 어쩌면 근면과 성실이라는 전통적 가치에 가려져 부정적으로만 인식되던 말. 야근과 잔업에 지친 현대인들이 비로소 긍정하게 된 말. 나태와 태만이라는 말과 비교하면 어쩐지 싫지 않고 친근한 말. 하루 종일 멍만 때리고 있거나 가끔 뒹굴거리기나 하는, 나아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 무아의 경지에 도달한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단어로 묶을 수 있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쳐 고른 말. 그래서 나온 제목, 게으른 고양이.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무심하고 또 여유로운, 무념의 경지에 이른 고양이들의 모습을 준비했다. 고양이란 생물은 예부터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물로 여겨졌다. 이는 잠과 쉼의 경계에서도 적용된다. 어쩌면 이번 편의 사진 속에 담아낸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건 자는 모습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들은 수면과 휴식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탓이다. 넓게 보면 휴식이란 수면도 포함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지킨다. 영원한 우리의 거대 아기 구로. 이때는 미니멀리즘의 극을 달릴 때라 가구가 별로 없었다.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말년 병장을 바라보는 따끈따끈한 이병 마구로
"구로야, 그거 알아? 이렇게 몸을 반만 걸치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들어." "츠동 형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카메라나 똑바로 쳐다봐."
마끼는 하루의 절반을 캣브로의 몸 위에서 보낸다.
커버를 열어 관측하기 전에는 자는지 쉬는지 알 수 없는 슈뢰딩거의 루비
"잘 건지 쉴 건지 하나만 딱 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형아, 나도 마끼 누나처럼 커질 수 있어요?" "넌 우리 집에서 제일 거대한 아가가 될 거란다."
"너는 엄마 위에 많이 올라가 있었잖아! 이제 내 차례라고!" "호애앵, 구로 형아가 나 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