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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캣브로 Jul 30. 2021

캣닢팔이 고양이 루카스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4냥꾼 캣브로, 서른한 번째 이야기




거친 고양이들만 모인다는 좁고 지저분한 어느 골목, 소복이 쌓인 하얀 눈 위에 마치 불꽃을 그린 듯한 작은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가로등과 달빛이 아니었다면 칠흑 같았을 새벽이 오면, 이곳은 집사 몰래 외출하는 고양이들의 은밀한 집합소가 된다. 일종의 흥신소인 셈인데, 고양이 해결사들이 하나둘 모이면 재미난 일들이 일어난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옆집 개의 이름을 알아내는 일부터, 집사가 목에 단 성가신 방울 목걸이를 벗겨내는 일까지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한 달에 한 번 달이 가장 뚱뚱해지는 날이면 캣닢이라는 마법의 풀이 은밀하게 거래된다. 캣닢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난폭한 고양이는 온순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잠만 자는 고양이도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는 신비의 묘약이다. 그래서일까. 평소보다 유독 많은 고양이들이 일탈을 위해 골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캣닢팔이 고양이 루카스는 집사가 잠에 들었는지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고된 일상으로 실신하듯 곯아떨어진 집사의 안쓰러운 얼굴을 뒤로 한 채 조심스레 옷장을 열었다. 코까지 내려오는 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장하게 캣닢 주머니를 입에 물고는 작게 읊조렸다. ‘달이 밝아. 골목으로 떠날 시간이야.’ 루카스는 거칠게 뻗은 오렌지색 털을 바싹 여미었다.


골목에는 이미 많은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다. 깜빡이는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엔, 다리가 짧고 험악한 인상을 가진 관리인 드미트리가 서 있었다.


“암호는?”

“궁디씰룩.”

“좋아. 물건은? 최상급 캣닢이겠지? 중요한 손님들이 와 있어. 저번처럼 깻잎을 캣닢으로 속이면 발톱 맛을 보게 될 테니 조심해.”

“물론이지, 드미트리. 나 루카스라구. 언제나처럼 최상급이야.”

“이봐, 충고 하나 하지. 이제 그만 캣닢 쪽에서는 발 떼지 그래. 자신감 넘치던 해결사는 보이지 않고 초라한 장사꾼의 모습만 보이는군.”


준비한 물건은 사실 공원에서 뽑아 온 잔디에 캣닢 냄새만 묻힌 가짜 풀이었다. 지금 같은 겨울에 최상급 캣닢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드미트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이 바닥은 신용이 생명이었다.


드미트리는 ‘하악’ 하는 소리와 함께 위협적으로 발을 한번 휘두르고는 루카스를 구매자에게 안내했다. 구매자인 남매는 자신을 루이와 클로에라고 소개했다. 한눈에 봐도 부촌에서 온 고양이들이었다. 크고 우아한 눈은 달빛에 반짝거렸고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길고 매끈한 털에는 윤기가 흘렀다. 루이가 수염을 씰룩거렸다. 눈빛에 의심이 가득했다.


“루카스라고 했나요? 캣닢을 파신다구요. 최상급으로.”


이어 클로에가 앞발 손질을 멈추더니 끼어들었다.


“수천 발자국을 걸어왔어요. 만족스럽지 못한 물건이면... 따라 하세요. 묘생 마감.”


남매를 호위하는 이국적인 외모의 고양이 두 마리가 예리한 발톱을 들어 보였다. 덩치는 작았으나 털 하나 없이 날카롭고 마른 얼굴은 자비를 모를 것만 같았다. 루카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힘겹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전 최상급만 취급하니까요.”


루카스는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아니면 추위 때문일까? 무언가 잘못됐다. 운 나쁜 고양이들을 상대로 한탕 하고, 발을 씻자는 계획이 틀어질 것 같다. 드미트리가 조바심을 낸 이유가 있었다. ‘어쩐지 오늘 밤 유난히 달이 밝더라니.’ 오늘 운이 나쁜 고양이는 루카스였다.


호위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루카스에게 다가오더니 캣닢 주머니를 낚아채 남매에게 전달했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실수로 잘못된 물건을 가져왔다고 능청스럽게 연기해 볼까, 그것도 아니면 한바탕 싸워 보는 건? 루카스의 작은 머리에 수많은 선택지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런 위험한 일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행크. 건방진 길고양이 녀석.’ 루카스는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그 날을 떠올렸다.


“거기, 갈색 고양이. 그래 너 말이야.”

“나 말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갈색이 아니라 상큼한 오렌지색이야. 그리고 내 이름은 루카스지. 연탄 위에서 뒹굴다 온 것 같은 녀석아.”

“보통은 고급스러운 잿빛이라고 하네만... 뭐 어쨌든 반갑네. 친구. 나는 행크라고 하네. 덩치도 좋고 아주 거친 눈을 하고 있구먼. 나와 함께 세상의 부를 움켜쥐어 볼 생각 없는가?”

“친구? 저리 꺼져. 몇 가닥 남지 않은 털마저 뽑히고 싶지 않으면.”


루카스는 집세를 내기에도 빠듯한 가난한 작가 지망생인 집사를 돕고 싶을 뿐이었다. 친구가 된 행크와 함께 얼마간은 새벽에 해결사 생활을 하며 자부심도 느꼈었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는 캣닢 거래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검은 거래의 대가로 받는 이 작고 빛나는 쇳덩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루카스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루카스와 집사의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루카스는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캣닢 주머니를 건네받은 남매는 얼굴을 맞대고는 한참을 뒤적이며 냄새를 맡았다. 고상하기만 했던 남매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리고 호위 고양이들과 불길한 눈빛을 몇 번 주고받았다. 순식간이었다. 호위 고양이 녀석들이 루카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루카스는 어쩌면 이제 집사를 보살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묘생 마감이라... 나쁘지 않은 삶이었어.’ 어느새 루카스의 눈앞까지 파고든 호위 고양이 중 한 마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뽑았다. 그 순간이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몸과 몸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털썩. 호위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졌다. ‘잿빛이군... 그리고 뚱뚱해.’ 옛 친구 행크였다.


“도망쳐, 루카스!”


루카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땅에 떨어진 캣닢 주머니를 입으로 낚아챘다. 어쩌면 집 근처 고양이들에게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공터에 도착해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행크를 만났던 곳이다. ‘행크는 잘 빠져나왔을까.’ 어지러웠다. 분노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아쳤다. 루카스는 앞발로 주머니를 거칠게 뜯었다. 이상했다. 냄새만 묻어 있는 싸구려 가짜 캣닢이 분명한데, 순간 루카스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고급 캣닢으로 만든 꽃다발이 앞에 높여 있었다. 환희감에 젖어 루카스는 앞발을 들어 잡으려 했다. 꽃다발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실망한 루카스는 다시 반쯤 남은 캣닢 주머니에 코를 박고 향을 음미했다. 주위가 빙빙 돌더니 하늘에서 녀석의 몸통만 한 생연어가 뚝 떨어졌다. 루카스는 입을 크게 벌리고 연어를 물었다. 맛도 보기 전에 그것은 물처럼 녹아내리더니 땅으로 사라져 버렸다.


루카스는 잔뜩 짜증이 났다.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은 주머니에 얼굴을 쏙 집어넣고는 마지막 캣닢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눈앞에는 꿈에서나 보던 거대한 캣타워가 있었다. 루카스는 홀린 듯이 캣타워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올랐다. 순간 캣타워는 모래처럼 부서졌다. 루카스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시커먼 형체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루카스는 누군가 자신의 몸을 핥아 주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시야가 돌아오자, 눈앞에 행크의 축축하고 못생긴 코가 보였다.


“행크... 많이 다쳤군.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가 봐.”

“옛날 일이지.”

“말없이 떠나더니만, 아까는 어떻게 알고 왔지?”

“드미트리. 드미트리가 부하를 보내 알려 주었어.”

“왜 그랬지?”

“넌 내 친구니까.”

“왜 떠났는지 묻는 거야.”

“캣닢에만 빠져든 너를 견딜 수 없었으니까. 루카스, 진짜 행복은 캣닢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어.”

“잘난 행복을 찾겠다고 떠난 거였군. 크게 한몫 챙기자고 먼저 다가온 건 너 아니었나?”

“싸우려고 온 게 아냐. 루카스. 크고 따뜻한 눈으로 집사를 바라보며 갸르릉 소리를 냈던 게 언제인지 기억하나?”


한참을 말없이 발만 핥던 루카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젠장, 기억나지 않아...”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행크가 몰아붙이듯 다시 물었다.


“사건을 해결한 후 고양이들이 우리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일은?”

“그만해, 행크.”

“멀리서부터 집사의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 현관 앞에서 설레던...”


에오오옹! 퍽!


루카스는 앞발로 행크의 얼굴을 세게 갈겼다. 행크는 애써 피하지 않았다.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다.


“이제 좀 조용하네. 길고양이 출신이 집사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어?”

내가 방금 너 구해준 걸 잊은 건 아니지? 돌아가자. 루카스.”

“어디로.”

“해결사 시절로.”

“마음이 바뀐 건가. 행크.”

“행복하고 뿌듯한 나날이었지. 그저 난 캣닢이 전부가 된 네 모습이 싫었을 뿐이야.”

“드미트리가 날 받아 줄까.”

“캣닢팔이가 아닌 해결사 루카스라면 얼마든지.”

“좋아, 조건이 있어. 같이 가자.”

“어디로.”

“우리 집으로.”

“네 집사가 나를 반겨 줄까.”

“목욕만 잘 한다면 얼마든지.”


집사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는 루카스의 옆에 낯선 뚱보 고양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털에 피가 말라 붙어 있는 상태로 곤히 자고 있는 행크를 보며 집사가 먼저 한 일은 루카스를 깨우는 것이었다. 당황한 집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 고양이가 눈을 떴다.


“루카스, 잘 잤어? 옆에 있는 녀석은 누구야? 네 친구니?”

“야옹.”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일단 배부터 채우자. 배고프지?”

“야옹!”

“좋은 소식이 있어. 얼마 전에 출판사에 냈던 원고 있잖아.”

“야옹?”

“한 번 사무실로 와 주었으면 한다고 메일이 왔어.”

“야~~~ 옹~~~!”

“잘되면 캣닢 이만큼 사 줄게.”

“하아악!”

“왜 그래, 루카스. 캣닢 좋아하잖아.”


집사는 생각했다. ‘고양이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자신의 몸을 닦아 주는 집사의 손길을 느끼며 행크는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집사야. 눌러사는 것도 좋겠어.’ 루카스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발톱을 핥으며 생각했다. ‘썩 괜찮은 묘생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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