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에는 고3 아이들이 12명이었다. 작게는 1년 미만, 길게는 8년, 수학 공부의 역사를 함께 일구었던 아이들이다. 한 명 한 명 수능 시험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여행 가방을 꾸렸다.
5년 전 여행 밴드에 가입했다. 여자들만 가입할 수 있으며 혼자 또는 함께 여행을 떠나기 위한 동행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밴드 활동으로 떠난 첫 여행은 서울, 경기도, 창원, 대구, 전국 각지의 여자 11명이 떠난 세부 보홀로의 여행이었다. 우린 여행 떠나는 날 인천 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여행이 어땠냐고? 너무 무모하지 않냐고? 당연히 수 천 번 망설였다. 트렁크 가득 4일 동안의 짐을 챙기면서 여행에 대한 흥분보다 걱정만이 앞섰다. 여행을 들뜬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부터 하고 있으니 내 돈 내고 내가 가고자 한 여행에 왜 이리 사서 마음고생인가 하는 생각도 당연히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것도 물놀이라면 질색을 하는 맥주병인데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가기로 결정한 건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고 한정된 인간관계를 뛰어넘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처음 만난 우리들은 한 명씩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통성명을 할 사이도 없이 티켓을 발권하기 바빴다. 보통 티켓은 메일로 온 것을 확인만 하고 티켓 부스에는 이름만 확인하면 무난히 티켓을 받았었다. 그런데 진에어는 프린트를 해 와야 된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주위에 일행들이라고는 있지만 아직 혼자 무인도에 떨어진 느낌인데 등에는 식은땀이 좔좔좔 흐르고 메일함에는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행 중 한 명이 도와주겠다며 내 메일함을 함께 찾아 준 것이다. 아!! 정말 고마웠다. 다행히 메일을 찾을 수 있었고 무사히 발권을 마쳤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진다. 다른 일행이 트렁크 무게를 초과한 것이다. 그런데 서울 말씨를 예쁘게 쓰는 김자옥 분위기의 한 분이 바닥에 냅다 본인의 트렁크를 활짝 열어젖히더니 자기 트렁크에 물건을 옮겨 담으라는 것이다. 11명의 티켓팅 시간은 엄청나게 길어졌지만 시작부터 아줌마들 특유의 편안하고 따스한 느낌이 폴폴 났다.
맥주병인 나는 스노클링이 제일 무서웠다. 구명조끼가 흘러가는 대로 동동 떠다니는 나를 불쌍히 여긴 한 언니가 나를 잡아 주었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고 스쿠버다이빙이 취미였던 왕언니 덕분에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닷속 신비한 세계를 체험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4명은 소주를 챙겨 해변으로 갔다. 모래사장에서 소주 한 잔에 곁들인 각자의 인생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로 끼어드는 파도 소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 멤버들은 1인 여행 기업가, 영어 강사, 코칭 전문가, 주부 등 다양한 분야, 다양한 연령이었다. 그러나 '여행' 그 하나 만으로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주제가 있었다. 각자의 살아온 삶과 가치관이 다르지만 여행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4일 동안 누구의 엄마도 아니고 누구의 아내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 여행을 즐기고 추억을 만들어 나갔다. 전혀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모여 3박 4일의 시간을 함께 꾸려나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지 않은가.
1988년 미국의 수학잡지 ‘매스매티컬 인텔리전서’는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시작했다. 독자들에게 유명한 수학공식 24개를 주고 가장 아름다운 공식을 고르라고 한 것이다. 2년에 걸친 투표 끝에 영광의 자리에 오른 건 바로 '오일러 공식'이었다. 20년이 지나 이번엔 물리학잡지 ‘물리학 세계’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식을 뽑아 달라는 기사가 실렸다. 120여 명의 독자가 약 50가지의 공식을 보내왔다. 치열한 경합 끝에 오일러 공식이 ‘맥스웰의 전자기학 방정식’과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인 '오일러 공식'을 소개하면,
e, π, i, 0, 1 전부 한 공식에 들어가 있다. 대충만 봐도 머리 아픈 수들만 그득하지만 찬찬히 설명해 보겠다.
e는 오일러 상수이며 근삿값으로 2.718.... 의 무한소수이고 자연로그의 기초가 되는 수이다.
i는 복소수의 허수 단위를 이루는 수이며
π는 3.141592.... 의 원주율이라는 유명한 숫자이다.
e와π는 초월수이며 0은 정수, 1은 자연수, i는 허수이다.
어떠한 관련성도 어떠한 규칙도 없는 수들이 한 공식 안에 들어가 있다. 끝도 없는 초월수 e와 π, 여기에 실체가 없는 가상의 수인 허수 i로 이루어진 수에 인간이 만든 1을 더하면 0,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짧은 공식 안에 e.π, i, 1, 0의 아무 상관도 없던 것들, 모순된 것들이 모여 하나의 통일된 모습이 되는 것이 오일러 공식의 놀라운 점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공식이 된 것이다.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숫자들에도 자연스러운 이음이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린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의미를 스스로 발견해나기도 하고 다른 이의 의미를 사랑하며 내가 갖고 있는 의미를 그에게 더해주고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세부 보홀'여행은 나에게 '오일러의 방정식' 같은 의미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리들이 어쩌다 만나 함께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쌓았으며, 그날 그때의 시간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아름다운 장소로 기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의미 없던 장소가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인 여행지에서, 각자 완벽하지 못하지만 서로의 구멍을 메워주고 서로에게 충실했으며 서로를 배려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에게 빛나는 추억의 의미가 되어 준 여행이다.
무의미의 존재들이 서로 어울려,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어가는 삶,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인 '오일러 공식' 같은 삶을 우리 인생에서 많이 만들어 나갈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