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과 함께 시작하는 농구대잔치는 놀이라고는 크게 없던 학창 시절의 유일한 낙이었다. '코재'라고 불리었던 농구선수 '허재'는 코트 위를 종횡무진 달렸고 내 눈은 내 선수를 따라가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그는 내게 첫 스타이자,경기장까지 뛰어가'오빠'라고 소리치게 했으며, 나의 워너비였다.
팬덤(fandam)은 특정한 분야나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문화 현상을 말한다. 흔한 말로 '오빠(누나) 부대'라고 불리기도 하며 '워너비'라는 표현도 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에도 팬덤문화가 있었으니 그는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등장하는 '피타고라스( BC 582?~497?)이다.
직각삼각형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
중학교 수학 과정을 마치면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르나 이름 하나만은 기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후 모든 도형 문제에 제대로 끼여있으니 말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사용하지 않고는 풀이를 진행할 수 없었다. 한 독일 작가는 '피타고라스가 정리를 발견하고 황소 백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 그 이후로, 새로운 정리가 발견될 때마다 모든 황소들이 떨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나 말이다.
그는 어떤 생을 살았을까?
기원전 7세기, 유럽의 지중해 영역은 그리스 사람들의 활동무 대였다. 약사 속 그리스 사람들은 유목민의 성향을 발휘하여 개척 정신이 뛰어났고 전통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어서 많은 그리스 상인들과 학자들은 이집트뫄 바빌론을 여행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현지의 수학 지식도 함께 가지고 왔다. 이집트, 바빌로니아는 그 무렵 경제대국이며 선진국이었던 셈이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6세기, 고향 사모스를 떠나 이집트로 간다. 이집트 수학을 배우던 중,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을 때, 포로가 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좀 더 발전된 수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나이 40세였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수학법칙을 집대성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한다. 이른바 '피타고라스 학파'이다.
600명의 제자가 몰려들었다. 입회 규칙도 조금 특이하다.
1. 이 학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헌납한다.
2. 탈퇴 시에는 헌납한 재산의 두 배를 받아나갈 수 있다.
3. 엄격한 규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4. 모든 연구 결과는 '피타고라스'의 이름으로 발표해야 한다.
재산을 모두 헌납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니 그들의 수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높았던 것일까. 단순한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겼던 것일까. 어쨌든 진실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피타고라스 학파는 비밀결사조직의 성격을 보이면서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 수학자, 종교지도자의 멀티플레이어였으며 앎을 사랑했고 세상을 탐구하고 지식을 탐구하는데 수학을 연구했다. 그중 주된 대상은 '수'였다. 수의 구조와 숫자들 사이의 신비한 관계를 연구했으며 '세상의 중심은 수이다'라는 것에서 그의 수사랑을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피타고라스 정리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는 우연히 바닥의 타일을 보고 직각삼각형의 변을 가지는 세 정사각형의 존재를 보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증명과정은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설명하였지만 피타고라스는 도형을 이용하여 증명하였고, 이후 수많은 수학자들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증명 방법은 지면이 작아 생략하겠다.
왼쪽 그림은 피타고라스가 증명한 방법이며 오른쪽 그림은 교과서에서 많이 제시하는 증명법으로 유클리드가 한 것이다. 증명 방법이 궁금하시다면 댓글 주십시요!!
그렇다면 왜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렇게 교과서에 딱 등장시키고 매번 계산 지옥에 빠뜨리는 것일까. 피타고라스 자신도 황소 백 마리짜리 정리로 취급했지 않았는가.
직각삼각형 변 길이에 대한 관계는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도 일찍이 발견되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처음으로 증명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지겹게 했던 증명하는 수학인 논증 수학의 첫걸음이 곧 피타고라스 정리인 것이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는 곧 패닉에 빠진다.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 길이가 유리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수가 제곱해서 2가 되는 수, 즉 루트 2라는 것을 알고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이 새로운 종류의 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하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결국 이 알 수 없는 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기로 맹세한다. 그들은 수라는 것은 정수와 정수로 이루어진 유리수가 전부라고 인식했고 무리수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릴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히파수스는 그 비밀을 공개해 버렸고 너무 화가 난 동료들은 히파수스를 바닷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그의 몸은 아직도 지중해 바닥에 있다.
자신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새로운 앎을 무시한 결과 기하학과 대수학의 틈은 2천 년 동안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정리를 통해 논증 수학의 길을 열었던 피타고라스는 수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며 많은 이들이 격찬한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하학에는 위대한 보물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피타고라스 정리이고 다른 하나는 선분의 황금비 분할이다. 첫째가 황금이라면 둘째는 귀중한 보물이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의 '형부대 들은 수학에 대한 열정과 철학으로 팬덤을 이루며 뭉쳤다. 팬덤은 우리네 열정의 표출이다. 몰입할 열정이 있고 쏟아 낼 뜨거운 감정이 있어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