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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Feb 07. 2024

행복 : 내 앞의 파도를 무심히 받아들이는 것

행복에 대해

큰 집 사촌 언니는 나보다 세 살 많다. 사촌 언니는 국민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녔다. 동생 밖에 없었던 장녀인 나는 사촌 언니가 다정하고 착해서 무척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녀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 하고 싶었다. 안방에는 엄마, 아빠, 여동생과 남동생이 잠을 잤고 나는 건넌방에서 언니와 함께 잤다. 중학생이 되면서 그녀는 자기만의 독립적인 공간을 원한 건지 방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베이지색 면 커튼을 치면서 함께인 듯, 아닌듯한 동거 생활을 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베이지색 면 커튼을 볼 때마다 내가 뭔가 잘못 한 걸까 하는 죄의식과 수치심이 발동되기도 했다. 언니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큰집 사촌들이 방을 구하게 되었고, 베이지색 면 커튼은 우리 집을 떠나게 된 그녀와의 이별에 대한 슬픔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행복해야 돼"


우리 집을 떠나는 날, 언니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별의 아쉬움이 희석되어 그녀를 보아도 무덤덤해지고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까지, 그 말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왜 행복해져야 되는 것일까? 그냥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행복은 그냥 자연스럽게 옆에 두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될 대상 같았다. 치열하게 내가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처럼. 소소한 일상과 무탈함이 이어진다면, 행복은 내 곁에 뭉근하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월 전이었다. 눈을 들어 바라본  먼 산은 노랗고 빨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고 인도의 곳곳에는 바스락거리는 누런 단풍잎들이 구석지고 후미진 곳을 차지해나가고 있던, 그 즈음 언젠가였다. 나는 우울감의 늪에 빠졌다. 그것은 소리 없이 나를 덮쳐, 먹고 싶은 감정도 앗아갔고, 평상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놓았던 수많은 취미생활에 냉담해지게 만들었고, 생업 이외에는 쇼파와 한 몸이 되어 초점 없는 눈으로 리모컨만 돌리게 만들었다.

둘째 녀석이 군대에 입대해서 인 것일까? 상실이 작은 이유가 되겠지만 아들이 잘 적응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나는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던 일도 변화 없이 같았고 두 아들은 성인이 되어 크게 신경 쓸 일도 없는데 이 무기력과 공허감은 내 어깨에 왜 이렇게 덕지덕지 매달려있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이런 우울감이 스스로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내 옆구리를 툭 치고 들어와 삶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며 허를 찌르는 난데없는 변수처럼 말이다. 사촌 언니의 말에 저항했지만 결국 행복해야 한다는 목표 성취를 위해 나를 무장했던 것일까.



"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어요, 오늘 갑자기. 1년 반 정신과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이번 달부터 약을 끊었어요. 남편이 암 선고받고 내가 집안 가장이 되다 보니 이 현실이 밑기지 않았나 봐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내 인생에 닥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 인정하고 나니까 한결 수월해지더라고요"


늘 밝고 쾌활했던 지인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왔다. 1년 반 동안, 심리 상담을 받았다는 말과 함께... 뜻밖이었다.


"저도 요즈음 우울감 때문에 힘들어요"


우울을 말로 뱉고 나니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그것들이 공기 속으로 퍼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년의 갱년기를 맞아 느닷없이 찾아오는 무기력, 공허감, 우울, 심리적 불안은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칠 때마다 더 깊이 빠져버리는 늪과 같았다.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내 앞에 흰 거품을 뿜어대며 덮쳐오는 파도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 너란 녀석이 또 왔구나" 파도가 덮쳤다가 뒤로 물러설 때를 담담히 마주할 수 있다면 적어도 행복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울했구나. 그럴 수 있어. 우리 나이가 다 그렇지. 호르몬 때문에 균형이 깨지고 내 몸이 마음대로 안 돼. 약국 가서 훼로나민 큐 하나 사 먹어. 한 개 가지고 안되면 두 개 사 먹어. 3개월은 먹어야 된다 하더라"



친구의 훼로나민 큐 처방이 찰떡이다. 그럴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툭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니 행복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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